오상학 학예연구사, 21일 탐라문화연구소 학술세미나서 제기

▲ 21일 제주대서 열린‘제주지역의 고문서와 고지도’세미나. <조성익 기자>
조선시대 제주도의 지도는 시기별로 그 활용목적이 변화됐으며, 국내 최대 목마장, 군사전략적 요충지라는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형세 파악을 위해 지도제작이 일찍부터 행해졌다는 지적이다.

오상학 학예연구사(국립중앙박물관)는 21일 제주대학교에서 열린 탐라문화연구소(소장 조성윤) 2003 정기학술세미나에서 현존하는 조선시대 제주도 지도들의 변천모습(17세기 후반∼19세기 후반)을 시계열적으로 고찰했다.

오씨는 “17세기 후반 「동여비고(東與備考)」의 제주도 지도 등은 조선전기의 상황을 어느정도 반영하고 있으나 역사부도적 성격 성격이 강하며, 오름, 한라산 위치 등이 심하게 왜곡됐다”고 말했다.

또 18세기 전반에 들어 「탐라지도병서(耽羅地圖幷序)」,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한라장촉(漢拏壯 )」등 지도들은 보다 정교화 됐고, 대축척의 지도제작이 독립적으로 이뤄지는 가운데 특히「탐라지도병서(耽羅地圖幷序)」는 목판으로 널리 유포됐고, 영조 대의 군현지도책 제작에 활용되기도 했다고 밝혔다.

오씨는“한라장촉(漢羅壯 )」도 중산간 지대 목마장의 경계였던 돌담(일명 하잣)이나 소목장, 자목장 등으로 목장 이름을 기입하는 등 당시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19세기 전반 이원조 목사(1792∼1871)가 제작한 「탐라지도병지(耽羅地圖幷識)」처럼 지도가 행정의 도구라는 실용성과 예술적 흥취를 동시에 갖춘 이중성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그 반면, 김정호의「청구도」중 제주도 지도에서는 오름들을 전통적인 산줄기 인식체계에 따라 연맥식의 형태로 표현했으며, 방호소, 창고, 과원, 봉수 등 항목도 기호를 사용해 일관되게 수록하는 등 회화적 형식을 탈퇴하고 정제된 지도학적 표현을 추구, 실용 차원의 목적을 잘 충족시켜 줬다고 평가했다.

그는 특히 “19세기 후반 「제주도읍지(濟州道邑誌)」에 수록된 「제주지도(濟州地圖)」는 한라산을 풍수지도인 산도(山圖)처럼 맥세를 강렬하게 표현됐고, 독립된 형태의 오름도 상세히 기록되는 등 전통적인 양식을 따랐으며, 시대상의 변화에도 반영하려고 시도된 대표적인 읍지 부도(附圖)”라고 평했다.

‘제주지역의 고문서와 고지도’를 주제로 한 이날 세미나에는 오씨 외에도 고창석 제주대 교수의 ‘조선후기 제주지방의 분재기연구:하원동 강성택씨家의 소장문서’, 오창명 제주대 교수의‘제주도 고문서의 이두문과 이두 연구’, 양진석 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의 ‘18·19세기 제주의 수취제도(收取制度)와 운영’등에 대한 발표가 진행됐다.

이번 연구의 특징은 책으로 묶인 기록만을 사료로 취급했던 전례를 벗고, 그 동안 흩어졌던 낱장의 자료들과 그림, 지도 등도 역사적 사료로 충분히 가치가 있음을 보여줬다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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