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진리도 처참한 패배를 당한 후에야 그 빛을 발하곤 했듯이, 대부분의 정의도 만신창이가 된 후에야 승리했을 뿐이다. 얄궂게도 정의와 진리 앞에는 항상 그 힘을 가로막는 조직적인 여론조작과 대중선동이라는 장벽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위대한 철학과 예수의 숭고한 가르침이 좌절해야 했던 것도 바로 이 장벽 앞에서였다.

소크라테스는 근거없는 중상모략으로 고발을 당해야 했다. 대중 앞에서 자신을 변론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으나, 수 시간에 걸쳐 도도하게 흐르는 위대한 철학자의 달변도 무고를 증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테네 시민들은 소크라테스를 중상하는 여론조작과 대중선동을 이겨내지 못했고, 결국 시민들이 던진 투표로 인해 그는 사약을 들어야했기 때문이다. 당대 최고 철학자의 자기 변론도 판단력을 상실한 시민들을 어쩌지 못한 것이다.

근거없는 중상모략으로 고발당하기는 예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예수의 사정은 소크라테스보다는 나았다. 로마의 총독이 예수의 무고함을 믿는 듯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조직적인 여론선동에 휘말린 이스라엘 대중은 그 진실을 알지 못했고, 예수의 십자가형을 소리높여 요구했다. 결국 권세있는 총독도 충실한 예수의 제자들도 선동된 대중은 어쩌지를 못했다.

위대한 변론이나 고귀한 영혼도 조작된 여론이나 선동된 대중과의 싸움은 벅찼던 탓이다. 하물며 평범한 소시민들의 연약한 저항력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때문에 우리도 오랫동안 이런 역사의 한 복판을 헤매어왔다. 특히, 선거의 와중에서 이런 상흔은 더욱 역력했다.

실체가 불분명한 '××풍' '○○론'같은 여론조작은 대선·총선을 막론하고 유령처럼 명멸했으며, 이것이 모자라면 혈연·지연·학연에 호소하며 합리적인 판단과 선택의지를 집단적으로 매도하는 대중선동도 비일비재했다. 이러다 보니 인재를 키우기도 힘든 풍토에서 전도양양한 인재를 버려야 했으며, 이런 장벽을 돌파하며 당선되는 것은 경이적인 사건이라 부를 만 했다. 실제로 지역적인 황금분할이 역력했던 지난 15대 총선에서 온통 같은 정당 소속의 후보가 당선된 지역에서 K씨라는 다른 정당 후보가 유일하게 당선되자 '신기한 일'이 발생한 듯 연일 매스컴을 장식했을 정도였다.

문제는 이런 선거방식이 오랫동안 주효했다는 사실이며, 많은 유권자들 또한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우리는 소크라테스와 예수를 팔아 넘긴 아테네 시민과 이스라엘 대중의 어리석음을 비난하면서도, 정작에는 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해 왔던 셈인지도 모른다. "정치지도자는 다음 세대를 내다보고, 정치인은 다음 선거를 내다본다"고 했다. 우리의 선택이 누구를 향해야 하는지는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다. '다음 세대'를 준비하기에 합당치 못한 후보가 있다면, 우리는 그를 심판할 뿐이다.

독일의 막스 베버(Max Weber)는 '열정과 책임감과 식견'을 정치가의 세 가지 소질이라고 했다. 후보의 과거사를 통해 우리는 '일에 몰두해 들어갔던 열정 정도'와 그 '일에 대한 책임의식의 정도', 그리고 '실현 가능한 미래 비전을 보여주는 식견의 정도'를 기준으로 알곡 정치인과 쭉정이 정치인을 가려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후보와 마찬가지로 지금은 우리도 심판대 위에 올라서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또 다시 구태의연한 여론조작과 대중선동에 휘말려 선택을 그르친다면, 머지않아 미래가 우리를 버리려들 것이다.<이규배·탐라대 교수·일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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