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당시 토벌대에 의해 다리에 총상을 입은 오기생 할머니.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지금은 하루일과의 대부분을 누워 있어야 한다.  
 
지난해는 4·3 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고 노무현 대통령이 공식 사과하는 등 4·3 문제 해결을 위한 한 단계 진전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4·3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시작일 뿐 과제는 산적해 있다. 논란이 예상되고 있는 4·3 후유장애자 문제를 6회에 걸쳐 진단, 그 해법을 모색해 본다. <편집자주>

1. 서류만 후유장애자 =오기생 할머니

제주 4·3에 대한 재인식의 토대를 마련해 준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 그 배경은 1948년 음력 12월18일 벌어졌던 ‘북촌대학살’이다.

현재 구좌읍 평대리에 혼자 살고 있는 오기생(76) 할머니는 ‘북촌 학살’을 소설이 아닌 현실로 부둥켜안고 살아왔다. 기억을 되살리기도 싫지만 ‘핏덩이’나 다름없던 아들(당시 2세)을 학살의 현장에서 잃었다.

자신은 토벌대에 의해 온 몸에 총상을 입었다. 두 다리에 새겨진 총상 자국이 당시를 증명해주고 있다. 이로 인해 오른쪽 다리는 심하게 휘어 있으며 왼쪽 엄지발가락은 존재하지 않는다. 몸 한 구석에는 총알이 관통한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다고 한다.

주변 이웃들은 ‘젊은 시절 두 팔로 의지하며 살아왔던 억척꾼’으로 기억하고 있었지만 지금 그녀의 삶의 공간은 3∼4평 남짓한 방 한 칸이 전부다.

하루일과의 대부분을 누워 있어야 한다.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상처가 악화된 것이다. 집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자꾸 찾아드는 언어장애도 고통이다. 실제 할머니의 얘기 중 절반 밖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오 할머니는 “가끔 이동목욕봉사대가 찾아와 목욕 등 봉사활동을 해주는 것이 그나마의 위안”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할머니의 방문은 비가 와도 열려있다. 지난주 찾았을때도 마찬가지였다. 집 앞이 평대초등학교로 가는 골목인 탓에 사람들의 움직임이 그리운 것 같아 보였다.

이런 사정을 알았던 듯 정부는 오 할머니를 4·3 특별법에 따라 지난해 10월15일 열린 제주4·3위원회 8차 회의에서 ‘4·3 후유장애자’로 인정을 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공식 채택된 그 날이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심각한 문제가 존재했다. 정부가 인정한 후유장애자이지만 정작 의료지원금 혜택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향후 치료비, 개호비, 보조장구구입비 모두 ‘불필요’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4·3 후유장애자인 셈이다.

의료지원금 지급 결정은 병원진단서, 도실무위원회 의견서, 지정병원 치료비 추정서를 토대로 제주도지사 소속 ‘4·3 실무위원회’ 의견을 참고해 심사소위원회를 거쳐 국무총리가 위원장인 4·3 중앙위원회에서 최종 결정된다.

도 4·3사업소측은 “장애기록, 면담기록 등은 개인신상이라 공개할 수 없다”며 “의사의 진단서를 토대로 한 결정”이라고 답변했다. 하지만 마을주민들은 “4·3 당시 부상으로 평생을 고통에 시달렸고 지금도 통증을 호소하는데 치료가 필요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지난해 10월 4·3중앙위원회가 인정한 후유장애자는 113명. 하지만 이중 78명에게만 의료지원금이 지급되고 있다. 나머지 30여명은 오 할머니와 같이 후유장애자로 인정이 됐음에도 ‘치료 불필요’ 판정을 받았다.

문제는 또 있다. 이들은 재진단, 재심사를 받지 못한다. 현행 4·3 특별법에는 ‘재심’(再審)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행정심판’을 청구하는 방법이 남아 있지만 70세를 훌쩍 넘긴 노인들로서는 이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비가 오니 문을 닫고 나가겠다고 묻자 오 할머니는 “사람들을 지켜봐야 한다”며 손사래를 쳤다. 결국 방문을 나서며 ‘할머니는 치료가 필요 없다고 결정됐다고 합니다’라는 말은 꺼내지 못한 채 골목길을 나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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