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걸레에 비유한다면, 그 속성상 두 가지 걸레가 있다. 하나는 제 몸이 닳고닳아 없어질 때까지 세상의 더러움을 닦는 걸레요, 또 다른 하나는 세상에다 온통 제 몸의 더러운 구정물을 헹구어 세상을 오염시키는 걸레다. 4·13 선거를 앞두고 정말 가슴에 손을 얹고 세상사는 사람들의 정치와 문화를 이야기해보자. 새로운 세기를 살아가기 위하여 정치의 변혁 시민혁명은 가능한 것일까. 우리는 마음을 비우고 세상을 깨끗이 닦는 걸레가 될 수 있을까.

지조가 없어 몸과 마음이 헤픈 사람을 '걸레'라고도 하지만, "나는 세상을 닦는 걸레요."하고 걸레임을 자칭하는 소위 의식 있는 걸레도 있다. 신라의 원효 대사는 분명 의식 있는 '걸레 스님'이었다. 그런 큰스님이 아니더라도 진정 '눈물'의 의미를 아는 걸레가 있다. 몸 하나로 세상을 정화하는 예술가들 즉 '문화의 걸레'들이 있다. 그러나 문화의 걸레는 가난한 민중을 대변할 때 저항의 힘을 얻지만, 권력의 단물을 빠는 수혜자가 되어 떡고물로 비대해 지면, 곧 비판력을 잃고 나약한 문화주의자로 전락한다. 비정치적 순수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비껴 가거나 비판대신 체제에 정착 안주하며 진리 대신 욕망을 추구할 위험성이 있다. 노동이 아니라 지식을 파는 지식인의 한계와 속물성은 거기서 비롯된다. 그러나 '문화의 걸레'라는 속물성 자체는 인간적이다. 다만 욕망을 추구하면 사악해지고 진리를 추구하면 양심적이 되는 것이다. '딴따라(광대)'를 연행하는 걸레라 한다면, 모두에게 좋은 마음을 일으켜 신명나게 하는 살 판의 정치가라 할 수 있다. 살 판의 정치판을 만드는 딴다라의 정치를 기대한다. 몸을 팔아 민중의 애환을 어루만지며 한을 풀어주고, 그들을 웃기고 울리던 현실 정치를 오늘의 정치 현실에 접목시킬 수 있었으면 한다.

고대사회에서는 정치행위 자체가 굿이었다. 신에게 인간이 잘 되도록 기원하는 제천의식 또한 정치행위이며, 농사철에 동서로 나뉘어 싸우는 '줄당기기' 또한 농경사회의 정치의식이며 민속놀이다. 민중의 삶 속에서 춤을 추고 노래하며, 부정을 씻고 한을 풀어주던 광대패들 중에는 임꺽정도 있고, 장길산도 있고, 거리에서 객사한 이름 없는 사당패도 있다. 그들은 민중과 더불어 살며 생활 속에 봉사하고 실천한 뜻 있는 걸레들이었다. 그들은 욕망 앞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오늘날 사람으로서가 아닌 표나 돈으로, 여론 조사의 수치로만 계산되는 현대의 시민들은 욕망 앞에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어떤 '걸레'가 필요한가를 따져 보와야 한다. '문화의 걸레'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더러운 '걸레 같은 걸레'를 척결해야 한다. 낙선운동의 대상인 '걸레 같은 걸레'는 권력을 통하여 세상을 온통 폭력과 죽임의 개판으로 만들었고,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끊임없이 변절하여 왔으며, 비리의 명분을 찾기 위하여 말을 갈아타서 말을 많이 하는 걸레 정치꾼이었다. 그들을 외래어로는 '사쿠라'라 한다.

욕망 앞에 흔들리는 시민들은 이제 마음을 비우고 의식 있는 걸레를 찾아야 한다. 거지차림으로 세상을 돌아다니며 거리에서 걸림 없이 허드레 춤을 추었다는 무애무(無 舞) 창시자 원효 스님은 썩은 해골바가지에 고인 물을 먹고 "모든 것은 마음먹기 달렸다(一切唯心造)"는 깨달음을 얻었다.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의 화두, 더러움으로 더러움을 닦는 지혜의 화두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눈 먼 돈이 많이 나뒹굴고 있다. 항공권 구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고 있다. 경기가 좋아진 건가. 아니면 욕망 앞에 흔들리는 민심을 사려는 걸레들의 농간인가. 喝! 까마귀 우는 곳에 백로는 가지 않는다.<문무병·제주교육박물관 운영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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