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일씨의 죽음에 온 나라가 애도의 물결에 잠겨있다. 광화문에 또 다시 촛불시위가 나타났다. 이런 가운데 제주도민들에게는 작은 위안이 되는 일도 있었다. 4·3특별법 통과 이후 3년만에 이른바 수형인이라는 불법재판의 희생자들 가운데 희생자심사소위에 심사 의뢰된 모든 사람들이 4·3의 희생자로 결정되어 중앙위원회의 최종 절차를 기다리게 된 것이다. 사실 제주도민들에게는 불법재판 희생자들이 4·3의 희생자라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불과 며칠 사이에 수백 명을 사형언도, 집행한 점이나 자신이 재판을 받은 기억도 없이 형무소에 가서야 교도관을 통해 형량을 알게 된, 그나마 판결문도 없는 그런 행위를 불법재판이라고 부르기조차 못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일단 국가의 재판을 받고 형을 받은 사람들을 국가가 희생자라고 인정하여 명예회복을 시킨다는 것은 법적 안정성을 해치는 일이며, 꼭 필요하다면 법률이 정하는 재심절차에 따르는 것이 좋다는 군경측의 논리를 무마하고, 가능하면 그들의 동의를 얻어 만장일치로 명예회복을 시키는 것이 화해와 상생이라는 4·3특별법의 취지에 합당하다고 여겨 그 오랜 시간을 참고 설득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로써 대통령의 공식사과로 마무리된 듯한 4·3의 1단계 해결과정 중 마지막 걸림돌이 제거되었다는 역사적 의미가 더해졌다.

김선일씨의 죽음을 유가족들과 함께 애도하며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무능한 정부를 비난하는 국민들의 외침은 정당한 것이다. 그들은 국가의 존재 이유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다. 국가는 국민의 안녕과 복리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만일 국가가 우리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그런 국가는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4·3의 와중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우리 제주도민을 적으로 간주하여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3만을 넘는 대량학살을 자행했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에 대항하여 싸우다 상대를 죽음에 이르게 하더라도 정당방위로서 정당성이 인정되는 것이 상식이라면, 도민들이 이런 정부에 대항하여 생존을 추구하는 것은 법 이전에 생명의 법칙으로 정당한 것이다. 만일 그런 상황에서 아무런 항거도 하지 않고 그저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린다면 자신의 생명을 지키야 할 최고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셈이 되는 것이다. 생존권을 위한 저항이란 이런 의미에서 4·3을 항쟁이라 부른다면 그것은 옳은 말이다.

내 생명을 지키는 일은 본능으로 보나, 윤리로 보나 그 무엇보다도 우선적인 의무다. 그러나 여기에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 내 생명 뿐 아니라 다른 생명도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다른 생명도 지켜줘야 하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도리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렇게 소중한 자신의 생명을 더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내어놓는다면 가장 위대한 사랑의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제 4·3운동은 소극적인 항쟁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다른 이름은 평화운동이다. 미국의 꼭두각시가 되지 말자고 민족자존심을 부추기는 것도 좋다. 석유 몇 방울 더 얻으려다 많은 아랍국가들에게 미움을 사게 되니 소탐대실이라며 더 많은 국익을 말해도 좋다. 우리 아들들을 죽음으로 내몰 수 없다고 외쳐도 좋다. 그러나 반전운동은 우리의 생명과 자존심을 위한, 더 더구나 국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더 큰 이상인 사랑과 평화에 기초해야 한다. 응징은 테러와 다를 바 없는 증오의 산물이며, 국익은 이기심의 또 다른 표현일 뿐, 아랍에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고자 소망했던 김선일씨의 희생을 욕되게 할 뿐이다. 그를 참혹하게 살해한 테러범이라는 사람들까지 포함한 이라크인들과 지금도 어디선가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 살해되는 이들, 메마른 들판에서 굶어 죽어가는 북녘 어린이들을 포함해 모든 인류의 아픔을 우리 마음으로 끌어안고 함께 나누고자 할 때 평화는 이미 우리 마음에서 싹이 트는 것이다.

<임문철·중앙성당 신부>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