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오늘. 늦은 시간까지 텔레비전을 시청하던 국민들은 깜짝 놀라야 했다. 밤 11시30분께 '17일 자정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계엄령을 확대 선포한다'는 내용의 자막이 흑백화면 아래쪽을 채웠기 때문이다. '10.26사태' 직후 비상계엄령이 내려진 이후 10번째였던 이날 계엄포고(10호)는 전 현직국가원수 비방금지, 정치활동 중지, 대학휴교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계엄사는 이날 김종필 이후락 씨 등을 권력형 부정축재혐의로, 김대중 예춘호 문익환 김동길 이영희씨 등을 사회혼란 및 학생 노조 소요 조종혐의로 연행했다. 이 계엄포고는 당시 全斗煥을 비롯한 쿠데타 세력인 '신군부'가 국가권력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신호탄이었다.

다음 날인 18일 광주에서는 계엄철폐와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는 학생 시민들은 대규모 시위를 통해 '5.18광주민주항쟁'을 시작했다. 당시 계엄사는 이를 '국가 전복을 위한 내란'으로, 시위에 나선 시민 학생을 '폭도'로 규정했다. 신군부는 광주와 관련된 모든 보도에 재갈을 물려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았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자신이 서명한 '5.17계엄지역확대조치 및 포고령 제10호에 의한 보도통제지침'으로 신문 방송 통신에 대해 무자비한 언론탄압을 자행했다.

최근 李珉奎교수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언론보도 분석-검열 삭제된 기사를 중심으로' 란 논문을 통해 당시 신군부의 언론검열 실상을 분석 공개했다. 계엄이 선포된 79년10월27일부터 81년1월24일까지 계엄사 보도검열단은 27만7000여건을 사전 검열, 2만7058건(전면 1만1033건, 부분 1만6023건)을 삭제했다. 검열탄압은 광주민주항쟁 기간에 극을 달했다. 이 논문은 7개 신문, 5개 방송, 2개 통신사를 대상으로 한 것이어서 당시 전국의 모든 언론사를 대상으로 하면 엄청나게 불어날 것이다. 당시 신문들은 지면에서 삭제된 부분을 그대로 놔둔 채 발행, 무언의 저항도 했다. 이를 눈치 챈 검열단은 공백 없이 발행토록 강요했다. 그 후 신군부는 언론 정화를 구실로 무자비한 언론인 '학살'과 언론사 통폐합 등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5월 17일을 맞을 때마다 '오늘 언론은 제 몫을 다하고 있는지'로 귀결되는 감회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하주홍·코리아뉴스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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