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민일보 제주4·3연구소 공동기획

   
 
  ▲ 지난해 9월 의귀리에서 이장된 수망리 현의합장묘역은 역사교육장으로 활용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김대생 기자>  
 
‘현의합장묘’(顯義合葬墓)를 가려면 옛 묘역 먼저 찾아 가보자.

남원읍 의귀리 765-7번지에 위치한 현의합장묘 옛터는 도로와 바로 인접해 있다.

의귀사거리에서 초등학교 반대편인 동쪽방면으로 차량으로 2∼3분 거리에 있다.

이곳은 1949년 1월10일 의귀초등학교에 주둔했던 2연대 1대대 2중대 군인들에 의해 학살당한 희생자들이 집단 매장됐던 곳이다.

초등학교 동쪽 200m 떨어진 밭 일대에 방치됐던 시신들은 다음해인 1950년 봄 민보단에 의해 아무렇게나 ‘맬젓’(멸치젓갈) 담듯 이 곳으로 매장됐다고 한다.

시신을 수습하려던 유족들조차 누가 누군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구덩이 세 개를 파고 쓸어 담아버렸다.

1970년대 중반 세 무덤에 묻힌 후손들은 같은 친척이라는 뜻의‘삼묘종친회’가 생겨났고 1983년 봄 현의합장묘 비석이 세워졌다.

지난해 9월16일 유골 발굴 과정에서는 4·3 집단학살의 실체를 똑똑하게 증언해 줬다. 4·3 희생자 집단매장지 가운데 발굴된 첫 사례였다. 세 곳의 봉분에서 공식 확인된 유해만 39구로 뼈가 서로 엉켜있었다.

서쪽묘에서부터 17구, 가운데 8구, 동쪽 14구가 확인됐다. 10대 또래의 유해도 확인됐다. 이중 절반 정도는 성별조차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비녀, 옷, 단추, 안경알, 허리띠, 자물쇠, 인주 등 유물 50여 점도 나왔다. 유족들은 “젖먹이 어린이에서부터 90세 노인까지 묻혀 있다”고 했다.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제주대 의대 법의학팀은 “유아의 경우 연골 등이 약해 흙과 융합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혀 실제 유해는 더 많은 것으로 추정됐다. 발굴된 유골들은 유족들의 뜻에 따라 흙과 함께 화장돼 수망리 신묘역으로 이장됐다.

발굴에 대한 아쉬움도 있다. 유전자감식을 통한 신원확인 등 과학적 접근방식을 통한 진상규명은 진행되지 못했다.

집단매장지 및 유적지 발굴사업에 대한 정부차원의 대책마련이 시급한 대목이다. 4·3 특별법 개정 논의가 진행되는 마당에 이 문제가 구체화될 필요가 있다.

지금은 3기의 봉분이 있던 자리에 돌멩이로 흔적 표시만 된 채 잡풀만 무성하다. 안내문도 없어 그냥 지나쳐버리기 일쑤다. 도로확장 공사가 있을 예정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의 현의합장묘는 의귀리 옛터에서 차량으로 10분 남짓 정도 거리에 있다. 수망리 893번지다.

의귀사거리에서 수망사거리까지 간 다음 서쪽(서귀포방면)으로 가다 ‘찜질방’ 방면으로 조금 올라가면 찾을 수 있다.

4일간의 파묘, 유해발굴, 화장절차 등을 거쳐 지난해 9월20일 수망리 신묘역에서는 ‘4·3 현의합장 영가 하관 및 추도식’이 열렸다. 의귀리 옛터처럼 봉분 3기가 조성돼 있다.

현의합장묘 유족들은 이곳을 ‘4·3 위령공원’으로 조성해 나갈 계획이다. 올해 비석을 세우고 연차적으로 역사교육장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속령이골’집단묘지

"반세기 이념대립 상징 잡풀 우거진 또 다른묘"

남원읍 의귀리 속칭‘속령이골’집단묘지는 일반인은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곳이다. 길이 험해서가 아니다. 4·3 당시 숨진 ‘무장대’ 유골들이 묻혀 있기 때문이다.

무장대 시신들은 1949년 1월 의귀초등학교에 주둔했던 2연대와의 전투에서 숨진 뒤 학교 주변에 방치됐다 이곳으로 옮겨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유족회 관계자 등에 따르면 이 사건 이후 현의합장묘 학살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아직까지 정확한 신원이 파악된 희생자는 거의 없다. 15∼17구의 유골이 묻혀 있다는 증언이 전해지고 있지만 이 역시 확실치는 않다.

지난 5월 50여 년만에야 공개적인 ‘벌초’가 이뤄졌다. 생명평화탁발순례단과 현의합장묘유족회, 4·3연구소 관계자들이 나서 덤불 속에 감춰졌던 무덤의 형태나마 알아 볼 수 있도록 땀을 흘렸다.

탁발순례단은 ‘우익과 좌익 모두 이념대립의 희생자로 규정한다’고 새긴 표지판도 세웠다. 벌초 후에는 천도재와 함께 주변 돌들을 모아 작은 방사탑도 쌓았다.

그러나 이곳은 ‘공개벌초’ 3개월 남짓만에 다시 잡풀이 우거지는 등 세월의 흔적만 쌓여가고 있다. 남조로로 돌아오면서 남원읍 충혼묘지를 지나쳤다. 속령이골 무장대 집단묘지는 통일 이후에나 제대로 된 빛을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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