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간 숲지대 주민 200여명 은신·초토화작전 본격…40여명 총살

   
 
  ▲ 북제주군 조천읍 선흘리 목시물굴과 인접해 있는 4·3 당시 피난처. 주민들은 여기서 움막 등을 짓고 생활을 했다고 한다.  
 
토요일이던 지난 21일 처음으로 사람들의 무리와 함께 4·3유적지 순례를 떠났다.

북촌 너분숭이, 낙선동 성터를 거쳐 발길을 멈춘 곳은 조천읍 선흘리 산 26번지에 위치한 목시물굴이다.

선흘에서 덕천방면으로 가다 동백가든을 지난 후 한모씨의 양봉장이라는 푯말을 찾아야 한다. 윙윙대는 벌통사이를 지난 안 쪽 숲 지대에는 당시 선흘 주민들의 피난처와 굴이 나타난다. 지금도 4·3당시 주민들이 움막을 지어 생활했던 피난처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목시물굴은 입구가 두 개로 길이는 100m 가량이다. 한 쪽 입구는 한 사람이 ‘낮은 포복’ 자세로 들어갈 정도로 좁다. 용암이 흐르다 굳어버린 암석이 바닥을 형성해 울퉁불퉁하고 낮은 형상이며 안에 넓은 공간이 있다.

이번 순례의 안내를 맡은 오승국 4·3연구소 사무국장은 “지금은 인근에 도로가 뚫려 있지만 4·3 당시에는 그야말로 중산간 숲지대였던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은신하기에는 적당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함께 찾은 20여명의 전국언론노조 소속 대표자들은 굴 속으로 들어가 보자는 일부의 제안에 고개를 저었다.

이곳은 4·3 당시 선흘주민 200여명이 은신했다고 한다. 그러나 1948년 11월21일 함덕 주둔 9연대 초토화작전이 본격화되자 피신했던 주민 중 40여명이 한꺼번에 총살을 당했다.

11월25일 목시물굴에서 1㎞남짓 동쪽에 있던 ‘도툴굴’이 발각되면서 총살을 당하거나 함덕 대대본부로 끌려갔다. 토벌대는 살아남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한 끝에 또 다른 은신처였던 목시물굴을 파악했다.

다음날인 26일 오전 토벌대는 굴 속에다 수류탄을 투척했으며 숲으로 도망가지 않고 굴 속으로 숨었던 주민들은 대치 끝에 결국 총살을 당해야 했다. 이곳을 안내했던 사람도 함께 총살을 했다고 한다.

돌이 채 지나지 않은 한 여자아이는 당시 울음소리 때문에 들킬 것을 염려한 부모가 입을 틀어막았다가 숨졌다는 증언도 있다.

목시물굴은 지난해 제주4·3연구소와 제주도가 공동으로 펴낸 「제주4·3유적Ⅰ-제주시·북군편」가운데 다랑쉬굴과 함께 보존의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된 곳이다.

4·3 역사기행을 할 때 당시 아픈 상황을 직접 체험할 수 있어 주요코스가 되고 있다.

목시물굴의 영구보존방안으로 심층적인 추가 조사를 통해 문화재로 지정하는 방안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토대로 국가나 행정기관에서 토지를 매입해 적절할 보존방안을 찾아야 한다. 아울러 4·3평화공원과 연계한 평화·인권의 역사교육장이 되기를 4·3단체들은 희망하고 있다.

[선흘곶과 피난동굴]=상록활엽수 군락 풍성, 소개령속 일시 피난처

함덕리에서 한라산 방면에 위치한 중산간 마을인 선흘리.

선흘은 우리나라 최대 상록활엽수림지대인 선흘곶자왈을 품고 있다.

선흘 2리 소재 서검은이오름에서 분출된 곶자왈 용암이 선흘1리 동백동산까지 폭 1∼2㎞를 유지하며 7㎞정도 흘러가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구실잣밤나무와 붉가시나무 등 상록활엽수 군락이 풍성하다. 용암흐름으로 커다란 냇가처럼 주변보다 지형이 낮고 곶자왈용암류가 습도와 지열을 유지한 것도 군락형성의 한 원인이다.

난대림 속 자연동굴이라는 조건은 땔나무가 풍부해 4·3 이전에는 생활의 공간으로, 자연동굴이 많아 4·3 와중에는 피난처가 됐다.

그래서 선흘주민들은 소개령이라는 ‘난리’를 피해 선흘곶지대 도툴굴, 목시물굴, 벤뱅듸굴, 대섭이굴 등에 숨어들었다.

‘굴 속에서 잠시 시간을 멈추면 목숨만은 살아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하던 소박한 희망들을 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굴 속 희망은 토벌대에 발각돼 무자비한 학살로 이어지면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소개령을 따라 해안변인 함덕, 조천 등지로 피난갔던 주민들도 상당수가 ‘도피자 가족’이라는 법률적으로 뚜렷한 명분도 없이 희생을 당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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