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햇볕이 따사로운가 했더니 벌써 여름이 가고, 2학기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첫 발령을 받아서 학교에 온 지도 반년 가까이 지났다.

맨땅에 헤딩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엉망인 수업에, 또 손에 익지 않은 업무를 하면서 다른 선생님들과 인간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도 녹록치 않은 일이었지만 무엇보다 날 힘들게 만들었던 것은 우리 반 28명의 천하 무법자들과 무사태평(?)하게 하루를 보내는 것이었다.

월드컵 열풍이 아직도 남아있는지 쉬는 시간이 단 1초라도 주어지면 축구공을 들고 밖으로 뛰어나가기 바쁘고, ‘시험’은 언제나 딴 나라 이야기다. ‘노는 건 필수 숙제는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4학년 녀석들에게 적응하느라 내 목은 발령 일주일만에 쉬어버렸다. 아이들의 성격이 천차만별이라 그 모두의 비위를 맞춰줄 수도 없으며 그러한 것이 교육적으로도 옳아야 함이 당연지사건만 그러나 그 중에서도 단연 매일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블랙홀이 한 명 존재하고 있었으니 그 이름하여 K다.

그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 K는 부동심을 삶의 목표로 삼고 있는 나를 울리고 또 웃기는 비상한 재주를 지녔으며 성격은 또 어찌나 특이한지 제 기분이 좋고 싫음에 따라 지킬박사와 하이드로 변신이 가능하다. 도시에서 전학와 PC방이라곤 눈씻고 찾아볼래야 찾을 수 없는 시골에 살려니 본인은 오죽 답답할까 이해도 가지만은 K를 뺀 나머지 아이들은 샌님같은 K의 행동에 짜증내기가 일쑤였다.

심술로 치자면 놀부 동생이지만 마음은 어찌나 약한지 싫은 소리를 들으면 금새 눈물이 그렁그렁한다. 다른 친구들을 짜증나게 하는 것이 특기지만, 제 친구다 싶으면 청소까지 대신해주는 의리파이다. 나쁘다고도 좋다고도 할 수 없는 K의 행동들 때문에 내 목소리는 하루종일 롤러코스터를 탄다. 넉 달 정도 지났을까. 위태위태한 날들이 가까스로 지나가나 싶더니 어느 날 K의 ‘집으로’ 사건이 벌어졌다.

주요 포인트는 K의 집이 학교와 너무 가깝다는 것. 배경은 점심시간, 주연은 K와 몇몇 남학생, 특별 출연에 K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있으며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친구들과 싸우다 분에 못 이겨 집으로 도주해버린…이랄까.

하여튼 이 사건은 그동안 이상한 기류가 흐르던 우리 반에 크나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고 서로에 관해 솔직하게 터놓고 얘기하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나 또한 생각이 많아졌다.

과연 K는 나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내가 K를 사랑하며 또한 야속해하듯이 K도 그런 생각을 할까? 그리고 더불어 아이들의 눈에 나는 어떤 담임 선생님으로 비치고 있을까? 그네들의 세계에 나는 어떤 존재이며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까? 머릿속이 헝클어지면서 없던 교육관에 더 큰 구멍이 생겨버렸다. 좋은 선생님은 어떤 선생님일까? 아이들의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는 것이 좋은 선생님일까? 아이들의 기분이 어떻든 내 교육적 주관에 따라 강하게 밀어붙이는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인가? 슬프지만 기분 좋은 고민이다.

학창시절 냉정하단 소리를 듣던 내가 K를 통해 울고, 웃고, 화내고, 기뻐하는 인간이 되어간단 사실이 눈물겹게 고마워졌다. 비록 만난 시간은 짧지만 “사랑한다.. 사랑한다.” 백번 천번 말해도 모자란 것 같다. 아직도 어리버리하고, 서투르게만 보이는 담임 선생님이지만 마음만큼은 누구 못지 않고 싶다. 오늘도 K와 그의 일당들로 인해 소리지르고 미안해하겠지만 그것이 새내기 교사의 기쁨이란걸 우리는 서로 이해할 것이다.
<고안나, 저청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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