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탄압 미화…재평가 필요”

   
 
   
 
자신의 부하에 의해 최후를 맞은 박진경 대령.

그는 제주4·3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 하나다. 9연대장이던 김익렬
중령이 해임되자 1948년 5월부터 대신 11연대장으로 토벌작전의
책임자를 맡았다. 한달 동안 토벌작전의 공로가 인정돼 대령으로
초고속으로 진급했다. 딘 미군정장관이 직접 제주를 찾아 계급장을
달아줄 정도로 미군정으로부터 신임도 두터웠다.

하지만 1948년 6월17일 대령진급 축하연을 마친 박진경 대령은 다음날
새벽 부하였던 문상길 중위 등에 의해 암살을 당해야 하는 운명을
맞이했다.

그의 죽음은 육군장(陸軍裝) 제1호로 기록됐고 암살을 주도한 문상길
중위 등은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사형 집행 1호’로 기록됐다.

박진경 대령에 대한 평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암살소식을 전한 미군정보고서는 “조선의 부대장 및 야전지휘관 중에서
가장 탁월한 사람으로 평가되던 인물”(Hq.USAFIK.G-2 Periodic
Report. No863. June 18. 1948)이라고 논평했다.

하지만 ‘화평정책’을 폈던 김익렬 연대장과는 달리 그는 강경탄압을
주도한 인물로 평가를 받고 있다. 토벌 한 달 여 만에 포로를 무려 수
천명이나 잡아들였다고 한다.

미군정 입장에서는 ‘성공적인 작전’인 반면 도민적 시각에서는
‘무차별 체포작전’이었던 셈이다. 그가 연대장 취임과정에서 발언
내용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민 30만 명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

이런 박진경 대령을 기리는 추도비가 제주에 남아있다.

충혼묘지에 있는
‘故陸軍大領密陽朴公珍景追悼碑’(고육군대령밀양박공진경추도비) 다.
충혼묘지 입구에 단독으로 세워져 있어 상징성을 부여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1950년대 처음 세워졌으나 비석 마모 등으로 인해 1985년 ‘제주도민과
군경원호회 일동’ 명의로 다시 세운 것으로 돼 있다. 초기 비석은 다시
세운 비석 앞에 묻혀 있다고 적혀있다.

비석뒷면 추도비문 내용 중에는 ‘제주도공비 소탕에 불철주야
수도위민의 충정으로 선두에서 지휘하다가 불행하게도 장렬하게
산화하시다’고 언급하고 있다.

‘30만 도민의 뜻을 모아’라는 구절도 있어 그의 ‘30만 명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는 취임 발언과 대조를 이룬다.
4·3단체들로부터는 도민학살을 미화하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사례로
이 추도비를 꼽기도 한다.

그의 고향인 남해군에서 ‘양민학살자 박진경 동상 철거 운동’이
벌어지던 2000년 초반에 이곳 추도비도 철거해야 한다는 여론도
있었지만 여전히 견고하게 서 있다. 비석 앞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군가 돌로 찍어 놓은 자국이 남아있다.

4·3단체 한 관계자는 “역사를 왜곡하고 있고 4·3의 가해자격을
추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철거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지만 오히려
지금처럼 보존하는 대신 구체적인 설명문을 세워 바르게 잡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살해를 주도한 문상길 중위는 법정 최후진술에서 “인간의 법정은
공평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법정은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그러니 재판장은
장차 하나님의 법정에서 다시 재판을 해 주기를 부탁한다”고 했다.

4·3특별법이 제정되고 진상보고서가 채택된 지금,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하는 시점이 다가오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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