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살면서도 오름을 처음으로 가는 날이다. 선두를 따라 부지런히 오름을 오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선택한 코스는 사람들 왕래가 드문 곶자왈이다. 길도 나 있지 않은, 나무와 가시덩굴들이 빽빽이 우거진 원시림이다. 길에 박힌 모난 돌과 사납게 뻗친 가시에 시달리며 정신없이 가다 보니, 이번에는 두꺼운 철조망이 네겹으로 가로막아 선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서야 간신히 통과했다. 짙은 숲 그늘 아래를 포복하여 조심조심 빠져나가는 모습들이 마치 전투 훈련병같다.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숲은 야생열매들과 정글 특유의 냄새로 우리를 유혹한다. 굵게 꼬아진 줄기들은 나뭇가지에서 치렁치렁 내려왔고 땅바닥까지 얼기설기 뻗어있다. 울창한 넝쿨 숲을 이리저리 헤치며 지나니 부드러운 바람을 따라 솔향이 감겨든다. 큰 소나무들이 군락을 이루며 늠름하게 서있다. 짙은 솔향에 젖어들면서 마음이 평온해진다.

그곳을 지나자 갑자기 경사가 가파른 오르막이다. 무더위에 다들 기진맥진. 그런데도 행렬이 멎지 않는 걸 보면 선발대는 지치지도 않나보다.

“전달! 십분간 휴식!” 갑자기 귀가 번쩍 뜨이는 산신(山神)의 음성. 전달하는 목소리마다 반가운 음색이 역력하다. 가다말고 멈춘 그 자리가 바로 휴식처다. 나무 등걸에 걸터앉으니 참으로 달콤하다. 간간이 목덜미로 서늘한 바람이 스친다. 주위를 둘러보니 거목들이 뿌리 째 반쯤 뽑혀져 있기도 하고 더러는 드러누운 것도 있다. 어떤 것은 몸통이 다 썩었는데도 한쪽 가지만은 살아있어 그 생명의 힘이 경이롭다.

쉬는 것도 잠시. 선발대장이 불뚝 일어서더니 “오몽!”하고 외친다. 여기저기서 “오몽, 오몽”하는 웃음 섞인 소리가 새끼를 차며 뒤로 넘겨진다. 활기찬 행진의 물결이 출렁인다.

오몽. 얼마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제주토속어인가. 불란서어의 비음처럼 들리는 멋진 소리. 어릴 적에나 듣던, 그리고는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말. 게을러지는 자신을 채찍질할 때나 늘어질 때 부지런히 움직이라는 뜻이 담긴 말. “늙을수록 오몽해야 한다”는 말은 우리 제주인들의 생활 지혜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몸을 움직일 수 있을때까지는 한가로이 놀지 않고 일을 해서인지 건강한 고령자가 많음은 분명하다.

드디어 오름 정상에 다다랐다. 사방에 수십개의 오름들이 신전처럼 널려있다. 얇은 사창(紗窓)같은 안개에 살짝 가린 초원도 신비롭기 그지없다. 그 위로는 잔잔한 평화로움이 흐른다. 서늘한 향을 지닌 감미로운 산 기운이 바람에 실려온다. 대자연이 주는 위대한 선물을 왜 잊고 있었을까. 여느 휴일처럼 내내 늦잠을 자며 오몽하지 않았다면 이런 큰 선물은 주어지지 않았을 게다.

“다시, 오몽” . 이번엔 하산하자는 말이다.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삼십여명의 일행들은 키득키득 웃으며 또 ‘오몽’을 읊어댄다.

나의 삶은 어떤 색일까. 여유와 부지런함이 조화된 생활로 감칠맛나는 은근한 색으로 가꿔가고 싶다.

오늘은 신체의 기운을 활성화시킨 원천 ‘오몽’이 나를 무척이나 행복하게 해준 날이다. 일행과 격의없이 나눈 대화에서도 일상적인 부지런함과 살풋한 정을 얻고 와서 마냥 뿌듯하다. 이런 넉넉함을 우리 학교 아이들에게도 한자락씩 나눠줘야지.
<도리교 교감·수필가·고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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