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지 순례] 역사현장 흔적은 없지만

   
 
  ▲ <사진=김대생 기자> 높이 솟은 제주도인민위원회 옛터와 9연대 헌병대 정보과 옛터가 한 앵글에 잡혔다.  
 
‘권력에 대한 투쟁은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라는 말이 있다. 4·3진상규명운동과정도 이러한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제주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건물들. 지금이야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기억해 낼 대상자체가 사라졌지만 ‘4·3’이란 역사의 한복판에서 그 존재의의를 확인했던 곳들이 있다. 제주도인민위원회, 서북청년회단 사무실, 제주신보사, 9연대 헌병대, 9연대 정보과 등도 4·3당시 역사의 현장들이다. 다시 이곳을 지나게 된다면 한번 망각된 기억을 상기해보시길 바란다.

△제주도인민위원회 본부=제주시 중앙로터리에 위치한 ‘나사로병원’ 자리에 있었다. 4·3당시는 ‘목포여관’이었다고 한다. 제주도인민위원회는 1947년 3·1사건 이전에는 ‘모든 면에서 제주도에서의 유일한 당이었고 유일한 정부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실제 미군정 시기에 전국적으로 인민위원회에 대한 해산명령이 내려졌지만 제주도인민위원회는 해산하지 않을 정도로 도민들로부터는 유일한 행정기구로 인식되기도 했다. 1945년 9월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된 후 인민위원회로 전환됐다. 위원장 오대진, 부위원장 최남식 등 핵심간부들은 항일운동가 출신들이 많았다. 이후 ‘민주주의 민족전선’으로 변모한다.

△서북청년단 본부=서북청년단 건물은 인민위원회 본부에서 탑동방면으로 2∼3분 거리에 있다. 현재 상가건물로 활용되고 있다. 일제시절에는 일본인 상점건물이었다고 한다. 해방 후 비어있던 2층을 서청에서 접수했고 이후 1층도 빼앗았다.

제주지역 서청은 1947년 3월 총파업으로 사임한 박경훈 도지사 후임인 유해진 지사를 경호할 목적으로 10여명이 입도하면서 시작됐다. 1948년 10월 이후 대규모 희생기에는 서청이 제1선에 나서 학살을 주도했다. 서청은 월남한 청년들의 조직인 만큼 공산주의에 적개심이 강했다. 그러나 4·3 증언자들 역시 ‘서청의 만행’에 대한 분노를 잊지 않고 있다.

△9연대 헌병대 ㅊ린 9연대 헌병대와 9연대 정보과 옛터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서 있다. 헌병대는 민간인들까지 연행해 고문하거나 즉결 처형했다. 산으로 도피했던 주민들 가운데 귀순했지만 고문 취조를 당했으며 육지형무소로 이감되기도 했다.

4·3당시 9연대 정보과는 탁성록 대위가 지휘하고 있었다. 9연대 정보과에 연행돼 즉결처형이 이뤄지면서 도민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탁 대위는 언론 등을 통해 아편중독자임이 확인되기도 했다. 9연대 헌병대 건물은 현재 ‘칠성로’ 진입로에 있었고 정보과 건물은 제주은행 본점 앞에 자리잡고 있었다.

△제주신보사=제주신보는 해방 이후 제주의 유일한 언론매체였다. 지난 91년 4·3연구소가 발행한 「제주신보」영인본(47년1월∼48년4월)을 통해 4·3 전후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4·3 당시 편집국장이던 김호진은 제주읍내에 살포된 삐라가 제주신보사에서 인쇄된 것을 빌미로 군수사대에 끌려가 1948년 10월 처형됐다.

서북청년단이 경영권을 빼앗았고 김재능 서북청년단장을 발행인겸 편집인으로 해 변칙발행되기도 했다. 당시 제주신보사 옛터는 ‘칠성통’에 위치해 있으며 의류점포로 사용되고 있어 옛 흔적을 찾기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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