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이른 아침에 제주도서관을 찾았다. 3층에 있는 성인열람실로 갈까 하다 여성전용인 1층 열람실에 들어섰다.

시험 때인가. 여학생들로 꽉 차 있어 빈자리가 없다. 어느 여학생이 친구를 위해 자리를 잡아놓았다가, 허둥대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던지 고맙게도 자리를 내준다. 어른에 대한 배려가 기특하다.

그런데 자꾸만 거슬리는 한 사람이 있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웬 남자다. 그는 여성열람실에 왔음에도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심드렁하다. 더군다나 허겁지겁 들어와 자리가 없어 어쩔 줄 몰라하는 여학생들의 낌새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저런 몰염치라니. 아무리 집중하려 해도 눈의 가시처럼 걸리는 그 남자 때문에 글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 여학생들은 그 무법자가 불만이면서도 감히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가끔 힐끔거리기만 할 뿐이다. 아무래도 이럴 때는 낯이 두꺼운 아줌마가 나서는 수밖에 없다. 주위를 휘둘러보니 어른이 더러 있기는 한데 모두 나 몰라라 하는 눈치다.

귀하디 귀한 좌석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문제지만, 그 때문에 여러 사람의 집중도가 떨어져서야 안 될 일이다.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겠다.

"이봐요, 이 열람실은 여자 전용실인데요? 3층에 성인 열람실이 따로 있잖아요"

주위에 있던 몇몇이 만족한 표정으로 소리 없는 박수 갈채를 내게 보내는 것 같다. 정의로운 내 말 한 마디가 여러 사람의 욕구를 충족시켜 줬음이 확연히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런 돌출 행동이 스스로도 자랑스레 느껴진다.

한데 뜻밖이었다. 거칠게 항변하며 반기를 들 줄 알았던 그가 상념에 잠긴 듯 나를 빤히 보더니 차분한 어조로 단호하게 답한다.

"여기는 여성과 장애인 열람실로 알고 있는데요?"
그러고 보니 그의 앉음새가 여느 사람과 다르다. 창백한 얼굴은 더 핏기가 없어 보인다.
그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터인데 말이 나오질 않는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책에다 눈을 준다.

나는 그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사과의 말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돌리고 엉거주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곤 그 동안 무심히 지나치던 팻말을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열람실 입구에는 "여학생·장애인 열람실"이라고 적힌 팻말이 반듯 번듯하게 부착되어 있지 않은가.

열람실에 잘못 들어간 사람은 그가 아니고 무모하게 함부로 내뱉은 나였음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그만 무안하여 얼굴에 모닥불이라도 껴 얹은 느낌이 들었다.

열람실에 도로 들어갈 용기를 잃고 현관에 멍하니 주저앉아 있는데, 그가 다리를 몹시 절며 나온다. 그에게 어떤 말이든 건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냥 망연히 있을 뿐이다. 아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막무가내로 목소리를 높인 이 아줌마가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화장실 쪽으로 안간힘을 쓰며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여간 힘겨워 보이지 않는다. 나는 공연히 마음이 스산하여 서둘러 책을 챙겨들고 도망치듯 그 곳을 빠져나왔다. 2005년에는 제발 이런 경망(輕妄)한 짓을 두 번 다시 행하지 않도록 조신(操身)해야겠다.
지금은 여학생실, 남학생실, 성인열람실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3층에 모두 위치해 있다.
<고연숙·도리교 교감·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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