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전대통령 동상이 여의도 국회의사당 한가운데 의젓하게 자리를 했다.그가 의회민주주의를 신봉한,그리고 대한민국 헌정사에 공이 큰 의회주의자라고 해서다.과연 이승만은 의회민주주의를 신봉한 의회주의자이며 혁혁한 공로자인가.

 그가 초대 대통령으로서 그의 신봉자 또는 찬양자(통칭해서 극우라고 하자)들로부터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이른바 국부로 추앙되고 있는 것은 국민다수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건국의 공로와 국부 칭호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생각이 없지 않으나 논외로 하자.하지만 정부종합청사도 아닌 국회의사당에 기념동상을 세울 만큼 의회주의자였던가에는 곤욕스러울 따름이다.국부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편의 독재자란 이미지에 비추어 더욱 그렇다.

 역사는 그가 의회주의자라는데 결코 손을 들어주지 않고 있다.불과 한달 여에 그친 일천한 의정 활동기간도 그러려니와 자신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해 준 국회에 대한 파렴치한 행동들에 비춰 봐서 그렇다.한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5·16군사쿠데타와 함께 중단되고 말았지만,이승만정부 시절 지방자치가 실시됐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6·25전쟁의 와중인 52년 5월 초대 시·도의회 구성을 시발로 역사적인 지방자치는 시작된다.풀뿌리 민주주의 착근이라는 관점에서 지방자치 실시는 이승만정부의 업적이 아닐 수 없다.그러나 지방자치 실시 동기는 그렇게 순수하지 않았다.전쟁의 와중임에도 지방자치제를 실시한 데에는 그만한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의회민주주의 본산인 국회를 유린하기 위한 또하나의 대항세력 구축이 그 배경이었다.사실이 그랬다.

 제헌국회에서 간선으로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출범 이후 줄곧 국회와는 원만한 관계에 있지 않았다.시일이 흐르면서 그를 지지하는 세력보다는 반대하는 세력들이 많아 졌다.그런 만큼 의회 또는 의원들에 의해서는 도저히 대통령에 재선될 가망이 없어 보였다.초조하고 조급해진 그는 자신의 입장을 지지해 줄 전국적인 세력기반 구축의 수단으로 지방의회 구성을 생각해 냈다.결국 그렇게 출범한 지방의회는 훗날 그의 뜻대로 직선제 개헌에 한 몫을 담당하며 재집권을 도왔다.

 자신의 정치세력기반 확보를 위해 전쟁의 와중에서 지방자치 실시를 강행한 이승만대통령.그는 자신의 정치 도박을 위해 지방의회를 십분 활용했다.각지의 지방의회로 하여금 국회해산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국회를 압박토록 했다.자유당과 그 기관단체 출신의 이들 지방의원들은 한발 더 나아가 임시수도 부산으로 집결,국회를 무력화시키면서 정치파동의 소용돌이로 몰아 넣었다.당시 제주읍내 제주극장에서 열렸던 ‘내각책임제 반대 도민대회’ 등은 같은 부류의 정치시위였다.웬만한 60∼70대의 제주유지들이라면 그 때의 기억을 갖고 있을 터다.

 이승만대통령의 의회존중이 아닌 경시가 어디 그 뿐이던가.정부출범 초기 국기 확립 차원의 반민법 제정과 이에 근거한 반민특위 활동과정에서의 이승만정부와 그의 역할,자신의 장기집권을 위한 국회 4사5입 개헌 등 헌정사에 오점을 찍은 굵직한 사건들만도 수를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다.결국 그는 민중혁명에 의해 독재자란 불명예 퇴진을 하기에 이른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그런데도 그가 의회신봉자이며 공로가 혁혁한 의회주의자라니 그야말로 역사를 우롱하는 처사가 아닌가.

 물론 그 자신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정치지도자로서 나름대로의 공과가 없을 수는 없다.그리고 그 공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학자마다 서로 주장이 다를 수가 있다.하지만 규모의 크고 작음을 떠나 국회와 지방의회를 정치도구화하고 의회정치를 유린했던 그가 의회주의자란 말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다.더더욱 유린을 당한 국회와 의원들에 의해 공적·선정의 동상이 세워졌다고 하니 역사의 아이러니다.<고홍철·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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