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씨의 묘" 서쪽 지경인 소낭굴은 주민학살의 현장이다.  
 
오후 들며 비가 흩뿌린 지난 29일.

4·3연구소 관계자들과 함께 제주시 회천지역 4·3유적지를 찾아 나섰다.

이 지역 대표적인 희생터인 ‘소낭굴’과 함께 ‘강씨의묘’(姜氏之墓)도 찾았다.

이곳은 동회천 마을에서 동부산업도로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3㎞가량 올라가면 철탑 맞은편에 쇠문이 보인다. 이 문을 따라가면 가족묘지가 나오고 여기서 차를 세워 칡오름 방면으로 3∼4분쯤 걸어가면 평범한 묘지를 찾을 수 있다.

‘강씨의 묘’ 다. 벌초한 흔적이 남아있는 등 비교적 잘 정돈돼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은 비석으로 몰렸다. 온전한 비석이 아니다. 비석이 이등분으로 두 동강이가 나있다. 비석 하단부만 남아있고 상단부분은 흔적이 없다.

자연적으로 파괴된 것은 아니다. 4·3 당시 토벌대가 이곳에 대한 토벌을 진행하다 무장대 간부의 선조라는 것을 알고 비석에다 총을 난사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금도 비석 군데 군데 총탄 자국들이 남아 있다.

실제 1949년 2월4일 토벌대는 도련, 봉개, 회천, 용강, 월평, 영평 등 당시 제주읍 8개리에 대한 토끼몰이식 토벌을 감행했다.

소낭굴은 주민학살의 현장으로 강씨의 묘가 있는 곳은 소낭굴 서쪽 지경이다.
강씨의 비석도 이 시기에 훼손됐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강씨의 묘는 4·3당시 무장대 사령관이었던 이덕구 선조의 것으로 파악됐다.
4·3연구가들은 주민 증언 등을 토대로 강씨의 묘를 이덕구의 할머니의 묘로 파악하고 있다. 비석 하단부 비문에는 이덕구 항렬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홍구(弘九) 신구(新九) 등 이름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이덕구는 제주4·3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1920년 북제주군 조천읍 신촌리 출신인 이덕구는 일본 교토(京都)의 리쓰메이칸대학(立命館大學) 경제학부 재학 중 학병으로 관동군에 입대했고, 해방 뒤 귀향해 조천중학원에서 역사, 체육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1948년 8월 당시 군사총책이던 김달삼이 해주인민대회 참가를 위해 월북하자 무장대 사령관으로 활동했다.

이덕구는 1949년 6월 토벌대에 의해 사살됐으며 시신은 당시 관덕정 앞에 며칠간 ‘전시’되기도 했다. 그의 가족과 친척들도 대부분 4·3 와중에 토벌대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그의 부인과 다섯 살 아들 진우, 두 살 짜리 딸도 4·3 당시 죽었다.

당시 진우가 울며 살려달라고 하자 경찰관이 “아버지 있는 산으로 달아나라”고 해 산쪽으로 뛰어가는 것을 뒤에서 쏘아 쓰러뜨렸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제주4·3연구소 한 관계자는 “이덕구 선조의 꺾여진 비석은 4·3의 역사적 비극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며 “그래도 매해 이곳에 대한 벌초가 이뤄지고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 < 회천지역 4·3유적지는? > ---

전형적인 중산간 마을이던 회천지역 역시 4·3으로 인해 엄청난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남겨야 했다.

희생터인 ‘소낭굴’을 비롯해 소규모 마을공동체였던 ‘드르생이’, ‘새가름’ ‘산물랑우영’ 등 잃어버린 마을로 변모하고 말았다.

소낭굴은 1949년 2월 제주읍 동부 8리 토벌작전 당시 무차별 총을 난사하고 전투기에서 기총소사가 이뤄지는 등 전형적인 양민학살의 실태를 보이면서 주민피해가 컸다.

서회천 자연마을이던 드르생이는 15호 가량이 살고 있었으나 초토화작전 이후 주민 이행이 잇따랐다.

대부분 과수원 터로 변했으며 방앗간 집담과 연자방아가 남아있는 곳도 있다고 한다.

20여호가 살았던 새가름은 1948년 11월27일 군경토벌대에 의해 마을이 초토화됐다. 현재 감귤원으로 변모해 당시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7가구가 거주했던 산물랑우영 역시 11월 초토화된 후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그러나 지금도 주민들이 살았던 곳은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고 일부 자취가 남아있다.

이 밖에도 은신처였던 ‘석구왓궤’와 희생터인 ‘감낭우영’ 등이 4·`3을 증언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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