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 숲만이 옛 삶의 터 증언

   
 
  ▲ <사진=김대생 기자> 동광리 "삼밭구석" 옛마을 팽나무와 위령비.  
 
지난 12일 남제주군 안덕면 동광으로 향했다.

서부관광도로를 따라 가니 아시아 축구의 지존을 가린다는 ‘A3 닛산챔피언스컵 2005’행사와 들불축제 홍보물들로 도로가 요란스럽다.

차를 쌩쌩 달리자 제주시에서 30분도 안 돼 동광 6거리에 들어섰다.

다시 오설록 단지 방면으로 900m 정도 가다 오른쪽 길로 들어서 100m 남짓 가면 삼밭구석 옛 마을터를 만나게 된다.

동광리 하동에 위치한 삼밭구석은 삼을 재배하던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졌다. ‘마전동’(麻田洞) 이라고도 불리운다. 300여년전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주위를 둘러보면 옛 집터임을 알 수 있는 대나무 숲이 눈에 들어온다.
4·3 당시 이곳에는 46가구 주민들이 거주했다. 임씨가 많았다고 한다.

1948년 11월 중순 이후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자 주민들은 은신처를 찾아 헤매야 했으며 12월에는 인근 ‘큰 넓궤’에서 생활을 했다.

이후 큰 넓궤가 토벌대에 발각되자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져 영실부근 볼레오름까지 숨어지냈으나 토벌대에 죽거나 잡혀갔다. 붙잡힌 주민들은 서귀포 단추공장에 수감됐다 정방폭포에서 집단 총살됐다고 한다.

삼밭구석 옛 마을터에서는 ‘4·3사건 위령비’를 찾을 수 있다.
‘관 주도’로 도지사 명의가 새겨진 4·3 잃어버린 마을 표석이 아닌 주민명의여서 반갑다. 지난 99년 4월 4·3당시 이 마을에 살았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추진위원회를 구성, 희생자를 위령하기 위해 세웠다.

“중산간 마을 이곳 사람들은 고향을 빼앗긴 서러움과 너무나 억울하게 돌아가신 영령들의 슬픈 통곡소리를 먼 훗날 후손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간직하고 이 사연을 만천하에 알리고자 이 비를 세웁니다”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4·3위령비 옆 팽나무는 드센 바람과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1982년 남제주군 보호수로 지정된 이 팽나무 앞에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현재의 팽나무는 당초 수령이 450년이나 된 ‘보호수’ 팽나무는 아니다.
비석 오른 쪽에 있던 보호수 팽나무는 2002년 8월 태풍으로 인해 밑둥 일부만을 남긴 채 잘려나갔다. 지금은 그 자취마저 감췄다.

현재 남아 있는 팽나무도 일부분은 상처가 심해 보호방안 마련이 필요한 것 같았다.
팽나무 아래 서자 찬바람이 세다.

--- <동광지역 4·3유적지는?>
무등이왓·사장밭 등 마을 4곳, 4·3 이후 복구 안돼 자취 ‘희미’---

동광리는 4·3 당시 삼밭구석 이외에도 무등이왓, 사장밭, 조수궤, 간장리 등 5개 자연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4·3 이후 간장리만 복구됐으며 나머지 마을은 자취가 희미하다.

그러다 보니 남제주군 안덕면 동광지역은 4·3유적지 답사객들의 발길이 많은 곳이다.

‘무등이왓’‘큰 넓궤’‘도엣궤’‘헛묘’ 등은 4·3의 아픈 사연을 속 깊게 간직하고 있다.

무등이왓은 4·3 당시 130여 가구가 살았던 마을이다. 47년 8월에는 미군정의 곡물수집정책을 반대하는 청년들의 운동도 일어났던 곳이다.

토벌이 본격화되면서 1948년 11월 마을이 전소됐으며 주민 100여명이 희생됐다. 마을터가 비교적 잘 남아있고 2001년 잃어버린 마을 표석이 세워졌다.

동광마을공동목장 내에 있는 큰 넓궤와 도엣궤는 초토화작전을 피해 인근 주민들의 두 달 가량 피난했던 곳이다. 체험을 통해 4 을 실감할 수 있는 곳 중 하나다.굴 내부가 험한 큰 넓궤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인근 도로개설 등으로 안전을 장담하지도 못하는 처지다.

동광 6거리 인근 밭에는 임문숙씨 가족의 헛묘가 있다.

동광리 목장 입구 300m 지점에 있는 김여수씨 가족의 헛묘도 있다. 시신이 없는 무덤이다. 이들의 헛묘는 4·3의 역사를 상징하는 곳이 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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