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제주에 살면서 여느 집안처럼 집사람과 세 아이를 포함해 다섯 식구가 한 식탁에 모여 앉아 식사를 한다. 특히 일요일 저녁만큼은 아빠인 내가 준비하고 설거지까지 마치기로 식구들과 약속했다. 내 스스로 가사노동의 중요성을 몸으로 체험하고 아이들에게 일하는 삶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이것 때문에 남편 혹은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염려는 결코 해 보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식사준비를 할 때면 아이들까지 돕겠다고 나서고, 집사람도 간혹 요리법을 안내하거나 설거지를 도와줘서 집안의 일치를 이루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 일이 이웃 주부들에게 알려지자 집사람은 많은 부러움을 샀고 나 역시 착한 남편으로 평가되었다. 하지만 동네 아저씨들로부터는 남자 망신 다 시킨다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어찌되었건 나는 1년 이상 이 약속을 70% 이상의 수준에서 지켜오고 있다. 이 점에 비추어 보면 나는 여성문제에 대해 매우 '진보적인' 남편이다.
하지만 우리 집 식탁에선 지켜야 할 또 하나의 규칙이 있다. 가장으로서 내 숟가락과 젓가락을 다른 식구들의 그것과 구별한다는 점이다. 언젠가 나는 밥을 먹다가 문득 어릴 때 밥상을 차리며 식구들 수저와 밥그릇까지 구분해 놓던 일이 떠올랐다. 동시에 우리 집을 살펴보니 모든 식구가 같은 수저, 같은 그릇으로 밥을 먹고 있는 게 아니가, 내 마음속에선 이런 식사문화가 혹시 가장인 나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하나의 요인이 아닐까라는 우려가 싹텄다. 어른을 어른으로 공경할 줄 모르는 무질서도 이런 편의주의적 생활방식에서부터 싹트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그 이후론 식사준비에 다소 불편하더라도 내 수저만큼은 따로 준비한다. 아이들이 식탁에 수저를 준비할 때 아빠 수저를 구분하게 하는 것이다. 집안에 어른의 수저를 따로 준비해 두지 않는 가정이 많은 요즘의 현실에 비추어보면 나는 매우 '보수적인' 가장인 셈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나의 이 두 가지 생활 방식이 모순적이겠지만, 나 자신은 어떤 모순감도 느끼지 못하며 살아간다. 학교에서 공부한 현대적 가치와 가정에서부터 몸에 익힌 전통적 가치가 내 안에 공존하고 있다. 더군다나 나는 이것을 모순으로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뿐만 아니라 내 삶 안에서 어떤 때는 현대적 가치가 어떤 때는 전통적 가치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노무현 후보가 '부마항쟁'이라는 민주화 운동의 전통을 지닌 부산에서 큰 표 차로 낙선한 이유를 찾는 것만큼 쉽지 않을 듯 싶다. 그래도 가정의 달인 5월이 가기 전에는 해답을 찾아야 할텐데.<김민호·제주교대 교수·교육학>
제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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