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여명 희생 실체 ‘숙제’

   
 
  ▲ <사진=김대생 기자> 섯알오름 백조일손 양민학살터. 안내판에는 양민학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촘촘하게 적혀있다.  
 
송악산 서쪽 자락에 위치한 섯알오름. 일제강점기에는 탄약고가 있던 자리였다.

제주4·3이 진정국면에 접어들었던 50년 8월20일. 이곳 섯알오름에 양민학살 광풍이 몰아쳤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7∼8월에 걸쳐 보도연맹원 등을 대량으로 학살사건을 일으켰다. 전국적으로 30만명이 이 시기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소위 예비검속에 의한 학살사건이다. 제주지역 역시 피해갈 수는 없었다.

당시 모슬포경찰서 관내 대정, 한림, 안덕면 예비검속자 344명 가운데 뚜렷한 법적절차도 없이 250여명이나 희생됐다.

섯알오름의 경우 한림항 어업창고와 모슬포 절간창고에 있던 수감됐던 190여명의 사람들 희생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몇 시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 50년 음력 7월7일 새벽녘에 일어난 일이다.

이날 희생자 유족 가운데 한림지역 유족들은 세월이 흘러 1956년 3월 총살현장에서 비밀리에 시신을 수습했다고 한다.

61구의 시신이 정확하게 누구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현재 한림읍 금악리 속칭 만벵디 공동묘지에 안장돼 있다. 백조일손지묘에도 억울한 양민학살의 원혼들이 모셔져 있다.

섯알오름 학살터는 지금도 당시 철근조각들과 휘어진 콘크리트 등을 확인 할 수 있다.

백조일손유족회가 세운 양민학살터 안내판이 서 있다. 유족회는 학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촘촘하게 적어 놓고 있어 처음 찾는 이들도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90년대 대정나라사랑청년회에서도 작은 안내판을 설치했다.

유족회 안내판 인근에는 유족회가 관리하고 있는 유물보관소가 있다.

보관소에 들어서면 뼈 조각을 비롯해 탄창, 의류 등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모두 섯알오름 학살터 현장에서 발굴된 것들이다.

그러나 당시 제주, 서귀포경찰서 관할 예비검속의 경우 그 전모가 다 드러나지는 않았다.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조차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섯알오름 학살터를 제주지역 주요 4·3유적지로 정비방안을 마련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올해 제주도와 4·3연구소 등은 도내 18곳의 4·3 유적지에 대한 학술조사와 종합정비계획을 수립하기로 했으며 섯알오름 학살터도 그 대상에 포함돼 있다.

섯알오름은 대정시가지에서 송악산 표지판을 따라가면 백조일손학살터 표지판이 나온다. 이 표지판을 따라 가면 일제강점기 알뜨르 비행장이 나오며 비행장 왼쪽으로 섯알오름을 찾을 수 있다. 이정표가 많아 이제는 찾기가 쉬워졌다.

--------백조일손지묘 ------------------
"백 할아버징 한 자손" 누군지 알 수 없어 한곳에....

백 할아버지에 한 자손이라는 뜻인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 섯알오름 학살과정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무덤이다.

계엄당국의 은폐 등으로 인해 유족들은 사망이후 6년여의 세월이 지난 후에야 이곳으로 이장해 올 수 있었다. 이미 시신은 누구인지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유골들을 모아 한 사람씩 수습했다고 한다. 132기의 봉분이 있다.

주로 모슬포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농민, 마을유지, 교육자, 공무원 등이 학살됐다.

1959년에 제작된 깨진 비석과 안내문은 살아남은 자들 역시 얼마나 힘든 세월을 견뎌야 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강제철거 과정을 거쳤던 이 비석은 99년에야 빛을 볼 수 있었다.

아픔을 간직한 곳인 만큼 제주역사기행을 할 때 빠지는 않는 곳이 됐다. 묘역도 정비가 이뤄져 깔끔하다 싶을 정도로 정돈된 느낌이다.

매해 7월 칠석날 합동 위령행사가 진행된다. 대정읍 상모리 586-1번지에 있으며 안내판이 곳곳에 세워져 있어 찾아가기 쉽도록 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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