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렸고, 잊혀져야 했던 역사 ‘4·3’이 우리 곁에 돌아온지 오래지 않다. 역사는 언젠가는 정체를 드러낸다지만 4·3은 수많은 세월을 묻혀 있어야만 했다. 「화산도」의 저자 김석범은 4·3을 ‘기억의 자살’로 부르기도 했다. 왜냐면 군사독재시절 4·3은 있었지만 없었던 것으로 죽어지내야 했고, 눈앞에서 펼쳐진 학살의 현장에 섰던 제주사람들도 자신에게 다가올지도 모를 또다른 4·3의 공포에 떨며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인 4·3은 그렇게 쉽게 잊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4·3은 ‘기억의 자살’로부터 살아나 우리 곁에 당당히 살아 숨쉬고 있다.

80줄을 바라보는 노인은 10대 소년시절 4·3을 보냈다. 처절한 기억이었고, 울분이었다. 자신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죽고, 아버지에다 큰형·샛큰형·큰형수·샛형수도 비운을 달리했다. 고향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큰형은 어느날 산군(山軍)이 돼 돌아왔다. 그후 불어닥친 광풍은 모든 걸 앗아갔다. 1948년 5·10선거, 토벌대의 무차별학살, 대대적 예비검속의 기억들은 아직도 노인을 10대의 품으로 되돌리곤 한다. 예비검속 때 “학교마당에 가 있어”라는 말을 듣지 않고 어스름이 깔릴 때까지 숨어있기에 지금껏 삶을 보존한다니 뭐라고 표현하는 게 좋을까.

주검이 된 아버지를 찾아 10대 소년은 하루 온종일을 헤매기도 했다. 정월께 토벌대의 습격으로 숨진 아버지를 찾아 나선 건 봄이 되어서다. 수많은 주검들, 살을 먹고 자란 잡풀을 헤치고 찾아낸 아버지는 죽기전 입고 있던 옷으로만 말을 할뿐이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버지의 주검 앞에 절을 올리는 심정은 어땠을까. 10대 소년은 그 자리에서 하염없이 울음을 터뜨리기만 했다. 그렇게 살아난 10대 소년이 지금의 우리 아버지면서 할아버지다.

그러나 4·3은 살아남은 우리 아버지들에게 새로운 올가미를 씌웠다. ‘제주도 사람은 털면 먼지 나지 않는 사람없다’는 식으로 철저히 소외돼 왔다. 연좌제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제대로 죽지 못한 원혼은 아직도 어딘가를 떠돌고 있다. 행방불명된 이들은 생일날 제사상을 받거나, 죽으러 나간 날을 기일로 잡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마을은 한날한시가 모두 제삿날이다. 대체 4·3은 무엇이던가. 4·3은 느껴본 자가 아니면 모른다. 4·3주간만이라도 4·3을 느껴보자. 우리 아버지들에게서 옛 얘기도 들어보고, 각종 행사에도 참가해 왜 제주도민이 억울하게 죽어야 했는지를 가슴속에 담아보자. 기억속에서 부활해 올곧게 서 있는 4·3이 우리 곁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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