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감귤의 과잉생산으로 인한 파동이 예견되어 모두들 걱정하고 있을 때, 그렇게 많이 생산되는 감귤을 땅에 파묻느니 굶주리는 북녘동포들에게 나누어 주면 어떻겠느냐는 아이디어 수준에서 시작된 "사랑의 감귤 북한 보내기 운동"은 막판에 이르러 농협 등의 적극적인 참여로 당초 목표였던 2천톤을 훨씬 넘어 5천톤에 이르는 감귤을 나누는 성과를 거두었다. 일부에서는 출하량의 증가로 인한 가격안정으로 감귤생산농가들의 고통을 덜어주자는 생각을 먼저 하기도 했지만, 종교계에서는 굶주리는 동포들이 있는데 하늘이 주신 귀한 식품을 버린다는 것은 죄악이라고 여기고 처리비용이 더 들더라도 사랑의 나눔을 실천한다는 데 더욱 큰 의미를 두었다. 그리고 이렇게 나누다 보면 남북한의 긴장완화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없지 않았다.

그리고 이 운동이 마무리될 무렵인 지난 2월과 3월 두 차례에 걸쳐, 필자를 비롯한 운동본부 대표단과 농민 대표들이 감귤분배확인이라는 목적으로 평양을 방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막상 북녘땅을 다녀오고 나자, 제주도민으로서는 처음으로 공식 북한 방문이라는 감격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향한 조그만 징검다리 돌 하나를 놓는다는 당초의 설레임은 다 사라지고 말로 다할 수 없는 비애와 안타까움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왜냐하면 북한의 실상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참하였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후에 연변 등지에서 탈북자들을 직접 대하면서 확인하게 된 것이지만, 겉으로 잠깐 살펴본 평양특별시가 그 정도라면 다른 곳의 다른 사람들의 생활은 오죽이나 비참할 것인지 상상이 가고도 남을 정도였다. 식량의 부족, 전력과 물자의 부족, 교통수단의 마비 그리고 그로 인한 사회질서의 붕괴와 도덕적 일탈 등은 어떻게 이런 사회가 지속될 수 있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리고 그 유일한 대답은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한 맹목적 우상숭배 뿐이었다.

우리 일행은 한없이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왔다. 하루라도 통일을 앞당기도록 뭔가 해야하지 않겠느냐는 평소의 마음은 갑작스럽게 북한이 붕괴되어 흡수통일이 된다면 그 충격과 혼란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로 바뀌었다. 누가 북한이 어땠느냐고 물으면 그저 "사람 살 곳이 못 되더라."고 답하곤 하였다. 그러던 차에 베를린 선언이 발표되었다. 북한의 도로와 항만, 전력 등 사회간접자본을 지원하고 평화정착기조를 조성하고자 한다는 내용을 접하면서 필자는 구절 구절마다 "그래, 옳은 말이야. 정말 그래야 해." 하는 말이 절로 나왔다.

이제 남북의 두 대표가 만나 감격의 포옹을 할 날도 한달 여밖에 남지 않았다. 일부 언론 등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이 잔뜩 지원만 하는 것이 아닐까 경계를 하면서 상호주의의 원칙을 고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준 만큼 받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뭔가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하고자 하는 대통령의 욕심이 장애가 될 수 있다며 만나는 것 자체가 큰 성과인 만큼 욕심을 버리라고 훈계를 한다. 그리고 혹시나 김대통령이 남북 화해에 기여한 인권 대통령으로서 노벨 평화상을 타게 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여, 노벨상을 탐내서 남북관계를 이용하지 말라고 짐짓 속내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인도주의적 지원마저도 군사력 증강에 이용될 수 있다고 현금이나 쌀은 죽어도 지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서해교전 상황에서 왠 금강산 구경이냐며 이미 이룩한 성과마저도 부수려고 든다. 그러니까 그들은 긴장상태를 고조시켜 분단고착상황에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구시대의 반공, 극우주의의 잔재들이며, 화해의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거역하려는 반역자들일 뿐이다.

우리 내부에 그런 반대세력이 엄연히 존재하듯이 북녘에서도 그런 세력이 존재하고 있음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들은 모두 민족의 화해와 통일이라는 역사적 대의명분 앞에 감히 반발하지 못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교묘히 방해공작을 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다. 그러나 어렵게 찾아온 이 기회를 다시 놓쳐서는 안 된다. 과거 YS의 남북정책의 실패는 김일성의 돌연한 사망 때문이 아니라 철학의 부재를 드러낸 멍청한 조문논쟁이었던 것이다. DJ는 그동안 꾸준한 햇볕정책을 통해 북쪽의 신뢰를 쌓은 만큼 경제협력과 인도적 교류를 통해 확실한 평화정착을 이끌어내야 한다. 국민적 합의라는 명분을 내세우는 수구세력들에게 발목을 잡히지 말고 신념과 인내를 갖고 통일의 길을 닦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 국민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서라면 IMF보다 더한 고통 분담도 기꺼히 할 각오가 되어 있다.<임문철·서문성당 주임신부>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