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국이었던 오키나와는 1872년 일본이 강제 점령, 1879년 식민지 정부를 거기에 설치하면서 일본의 군사거점이 된다. 1945년 봄 미국과 일본간의 오키나와 전쟁으로 오키나와인 1/3인 25만명이 희생되는 비극을 경험한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협정에서 미국이 오키나와에 대한 통제권을 갖게 돼 1972년까지 27년간 미국정부의 통치를 받는다. 지금 오키나와에는 37개의 미군기지, 29개의 해양 통제구역과 20개 항공통제구역이 있다. 일본의 0.6%의 넓이를 가진 섬에 일본주둔 미군 75%가 여기에 진을 치고 있는 셈이다. 미군 5만명 그들의 부대사업과 식솔들을 합치면 약 15만명 정도여서 전체 인구 130만명 인구의 12%를 차지한다. 한 평화운동가는 “ 미군이 오키나와에 반 영구적으로 주둔하므로서 오키나와는 언제나 전쟁상태에 있다. 아프카니스탄·이라크와 전쟁을 수행했을 때 미군은 여기서 발진하고 훈련하면서 전쟁을 수행하므로 오키나와 역시 전쟁중이었다. 하루하루의 전쟁과 연관되는 상황과 일상이 오키나와인들을 깊은 좌절감에 휩싸이게 한다” 라고 말한다. 미군들의 훈련비행은 계속 증가되고 군대는 오키나와에서 출전하여 싸우고 사람들을 죽이고 귀환하는 일이 반복된다. 이라크 전쟁이 수행중일 때 그 이전 보다 비행 범죄가 3배정도 증가했다는 미군의 통계는 이러한 전쟁으로 인한 미군과 오키나와 여인들간의 심리적 악순환의 고리를 말해준다.

미군기지 60년 주둔의 영향은 오키나와의 생태적 사회적 문화적 영역 전 분야에서 나타난다. 군작전에서의 독성물질의 사용과 군비행기들의 지속적인 작전수행 및 훈련으로 인한 소음은 생태계의 파괴를 가져옴은 물론 건강문제의 악화로 이어지고, 나아가 범죄와 사고에 의한 공공의 안녕의 위협으로 나타나 오키나와인들의 육체적 심리적 부담감은 점점 가중된다.

경제적으로는 미군기지에 의존적이고 기생하는 나약한 경제구조가 자리잡는다. 미군군사기지와 이와 연관된 서비스업이 오키나와 GDP의 5%를 구성하지만 경제의 큰 부분은 일본정부가 군사기지를 사용하는데 따른 동정적인 차원에서 주어지는 국가보조금 (오모이야리 야산) 의 형태로 공공사업프로젝트나 토지사용 임차금 형태의 지원금들로 주어진다.

2000년부터 국제자유도시를 표방하여 국제자유도시의 목표를 추진하고 있지만 미군의 존재가 외국기업의 투자를 막아선다. 실업률은 47개 현중 최고 수준이고 일본 본토의 고용은 차별을 받으며 GDP와 주민 소득 역시 최하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997년 12월 21일 주민투표를 통해 80%이상이 해노코 공군기지의 건설만이 아니라 미군의 완전철수를 의결했으나 미국과 일본은 이에 대해 요지부동이다. 1995년 미군에 의한 12세 소녀 집단 성폭행사건으로 두 정부는 기노완시 중심지의 악명높은 푸텐마 기지 등을 폐쇄하기로 합의하였지만 그것은 헤노코만의 공군기지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16년에 걸쳐 새로 건설될 이 기지는 해안가 2.5키로미터 걸친 공사로 야생물서식지가 파괴되어 희귀동물들이 없어지는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오키나와 국제자유도시를 입안했던 한 교수는 제주에 해군기지를 건설한다는 소식에 다음과 같이 필자에게 말했다. “ 오키나와는 국제자유도시를 추진해도 미군기지 때문에 될 수가 없습니다. 제주에 해군기지가 들어온다면 그것은 현대전이 가능한 큰 군사기지이며 미군 역시 공동 사용을 전제로 하는 것일 것입니다. 일단 군사기지가 들어서면 그것이 점점 확장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오키나와 133년의 군사기지화 과정은 절망이고 슬픔 그 자체입니다. 제주는 오키나와의 전철을 밟아서는 아니됩니다. 이것이 오키나와의 아픈 교훈입니다”<고창훈 교수 / 제주대 행정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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