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실무위원들과 함께 유럽 기행에 나섰다. 제2차 세계대전의 주범 히틀러의 만행과 독일의 반성, 유태인 학살의 본거지 폴란드 아우스비츠의 비극, 스페인 내전의 아픔과 전사자의 계곡, 프랑스 노틀담 성당과 유태인 순교자 기념관 등을 찾아 용서·화홰·상생의 실상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5월7일 오후 1시 40분, 인천공항을 이륙한 비행기가 11시간 만에 독일 프랑크푸르트공항에 착륙했다. 가슴이 설레었다. 히틀러의 제국이었던 독일 땅에 내렸다는 것만으로 흥분한 모양이다.

공항은 초라한 느낌이었다. 수도 베를린으로 가기 위해 프랑크푸르트 역에 도착했을 때의 인상도 그저 그랬다. 겉보다 내실을 다지는 실용주의적 삶의 모습이라 해야 할 것 같다.

간이음식점에서 가죽처럼 질긴 빵으로 요기를 하며 한참을 기다리니 베를린 행 열차가 홈으로 들어왔다. 4시간여를 달려 열차는 드디어 베를린 역에 도착, 이층버스를 타고 숙소로 향한다. 안개가 자욱하다. 네온불이 없는 베를린거리엔 가로등이 별인 양 하늘에 솟았다. 숙소 머큐어 호텔에 이른 것은 밤 9시, 여장을 풀고 자리에 드니 금세 잠이 밀려왔다.

이튿날, 빵과 과일 약간의 육류와 우유로 아침 식사를 때우고 베를린 장벽을 보러 나섰다. 슈프레이강가로 옮겨다 복원한 베를린장벽의 일부, 동독은 서베르린을 고립시키기 위해 하룻밤 사이에 4m높이의 벽을 40㎞나 쌓았다는 가이드의 설명은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게 사회주의 국가의 행태라 생각하니 고소가 절로 일었다.

분단의 아픔을 보기 위해 다녀간 사람들의 흔적이 벽을 메웠다. 남북통일을 비는 한국인들의 기원의 글도 여기저기에 보인다. 당시의 동서독 정상이 감격의 미소를 머금고 화해의 포옹을 하는 모습이 눈을 끈다. 우리나라에선 언제쯤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인가? 바람이 차다. 봄이면서 봄이 아니다. 장벽을 뒤로하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브란덴부르크 문을 보기 위해 왕의 산책로라는 쿠담 거리로 들어섰다. 5월8일은 독일 패전일이라 해마다 이 날이 오면 ‘반전 반 나치 궐기대회’가 열린다는 것이다. 아침부터 거리로 나온 군중들은 구호를 외치거나 연설을 듣고 섰다. 독일인 스스로 자기반성을 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

군중들 사이를 비집고 독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향했다. 문 앞엔 거대한 전시물이 서 있다. 폭격으로 파괴된 브란덴부르크 문의 험상궂은 몰골, 처참하게 파괴된 베를린 시가, 이를 통해 끊임없이 반전, 반나치 학습을 하는 독일 사람들이 존경스러웠다.

그 뿐인가. 나치의 괴수 히틀러의 집무실과 지하벙커가 있던 곳, 통일 독일의 수도 베를린 도심 한복판에 축구장 세 개만한 면적을 확보하여, 수많은 관들이 누어있는 느낌을 주는 홀로코스트, 유대인 대량 학살 추모시설을 해 놓았다. 독일 각지에 많은 유대인 추모 시설이 있는데 또 웬 시설이냐고 반대의 목소리도 높지만 독일의 지도자는 접근성이 뛰어난 이곳에 다시 대형 추모관을 세운 것이다. 자기반성을 철저히 하려 함이다. 그게 유대계 미국인 건축가 ‘피터아이젠만’의 설계라니 더욱 놀라게 된다. 이틀 뒤면 개관한다는데 겉만 보고 떠남이 못내 아쉬웠다.

‘자기 죄과를 인정하지 않는 자는 남의 죄를 말할 자격이 없다.’는 말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독일인들, 그러기에 히틀러를 찬양하는 자가 있으면 바로 정신병원에 입원시킨다 하지 않는가.

야스구니신사를 거침없이 참배하는 고이스미 일본 수상, 그가 바로 정신병원에 입원시켜야 할 대상이 아닌가 싶다. <조명철·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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