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운동 이젠 ‘긍정의 방향’으로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도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지난 2003년 10월31일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4·3사건과 관련해 제주도민들에게 공식 사과를 표명하며 한 말이다.

이 같은 대통령의 사과가 있기까지는 결코 순탄치 않은 도민들의 노력이 있었다. 4·3진상규명을 요구하다 옥고를 치르기도 했고, 4·3에 대한 글은 판금되거나 필화사건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오랜 기간 동안 제주도민들은 4·3을 입에 담지도 못했다.

4·3은 이제 땅속에 묻힌 역사가 아니라 세상 밖으로 나온 역사가 됐다. 그렇게 갈구하던 4·3의 실체가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기록됐고, 대통령이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공식사과까지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4·3운동은 끝이 아니다. “기나 긴 여정에서 큰 호흡을 한번 고른 것뿐이다. 이제 새로운 호흡을 가다듬을 때다”는 말 한마디는 4·3은 여전히 진행형임을 의미한다.

▲암흑의 시대 한줄기 빛이 되어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제주도에서 “4·3도 진상을 규명해야 할 것 아니냐”는 여론이 비등했다. 당시 이문교씨(현재 제주관광대 교수) 등 제주대생 7명이 ‘4·3사건진상규명동지회’를 결성, 자체 조사에 나서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같은 진상규명 운동은 채 싹을 틔우기도 전에 이듬해 5·16군사쿠데타로 물거품이 되고 만다.

군사정권에 의한 4·3에 대한 강요된 침묵은 1978년 한 소설가에 의해 깨어졌다. 현기영의 「순이삼촌」은 4·3의 참혹상을 폭로, 지식인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이는 4·3연구의 촉매제가 됐고 그 같은 성과는 10여년을 흘러 1989년 제주4·3연구소의 태동으로 이어진다.

1990년은 4·3운동에 있어 또 다른 획을 긋는다. 새해 벽두에 단행된 3당 보수야합은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려놓고 만다. 이런 가운데 제주신문 해직기자들이 중심이 돼 새로 창간한 제민일보는 4·3특별취재반을 구성, 「4·3은 말한다」를 연재하기 시작한다.

기자들은 발품을 팔며 4·3의 실체를 낱낱이 고발했다. 이들의 노고에 한국기자협회는 한국기자상(1993년)으로 화답, 지방의 자그마한 언론사가 전국 언론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제민일보 「4·3은 말한다」는 4·3연구소의 「4·3장정」과 함께 2003년 10월 정부가 채택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의 모태가 됐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 다른 시작을 다짐하며
2003년 10월 제주도민들은 반세기 넘게 응어리졌던 한(恨)을 씻어 내릴 수 있었다. 4·3의 실체가 정부 보고서로 기록됐고, 대통령이 직접 사과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4·3운동은 여기서 끝인가.
청년시절 거리에서, 강단에서, 기사로 4·3을 알려내기 위해 청춘을 불살랐던, 아닌 지금도 그 중심에 있는 40대 중반의 4·3운동가들은 단호히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강덕환 제주도의회 4·3피해상담실장(45)은 “이제는 4·3이 남긴 평화와 인권이란 교훈을 어떻게 실현해나가야 할 것인지가 4·3운동의 내용으로 자리잡아야 한다”고 했다. 같은 연배인 오승국 4·3연구소 사무처장도 “세계 평화의 섬은 4·3의 아픈 과거를 딛고 출발한 만큼 제주만의 문제가 아닌 동아시아, 아니 전 세계 평화·인권운동의 진원지가 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실현방도를 내오는 것 역시 4·3운동의 과제다”고 말했다.

제민일보 4·3전문기자로 10년 넘게 한 우물을 팠고, 4·3진상보고서 집필을 주도한 김종민씨(45)는 “대통령의 사과는 우리에게 화해와 상생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의미를 부여한 뒤 “4·3의 학살이 평화와 인권을 갈망하는 우리에게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된다면, 끔찍한 시절 이웃들의 목숨을 구했던 의인(義人)들에 대한 기억은 평화를 꿈꾸는 우리에게 정면교사(正面敎師)가 될 수 있다”며 “앞으로의 4·3운동은 포지티브(긍정적) 한 방향으로 진행돼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막연한 용서와 화해를 뛰어 넘어 ‘상생’에 4·3운동의 방향타가 맞춰져야 하는 시점이다.

◆인터뷰=박찬식 제주4·3연구소 연구실장

“기나긴 여정에서 한번 호흡을 고른 것뿐이다. 다시 새로운 호흡을 가다듬어야 할 때다”. 4·3운동이 어느 만큼 왔다고 보느냐는 기자의 어리석은 질문(愚問)에 대한 박찬식 제주4·3연구소 연구실장(45)의 현답(賢答)이다.

사실 박 실장은 대학시절 소위 운동권이었다. 역사학을 전공한 그가 강단에 서면서 진보적 지식인으로써, 이러저러한 인연으로 4·3과도 깊은 인연을 맺게된다.
박 실장은 “2003년 보고서채택과 대통령사과는 줄기찬 4·3운동의 성과물이자 또 다른 과제를 제시하는 전환점이었다”며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더욱 많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또 “국가차원의 진상규명과 대통령 사과가 1단계였다면 명예회복과 추가 진상규명작업, 기념·교육의 문제 등은 2∼3단계의 4·3운동이 될 것이다”고도 했다.
박 실장은 특히 “이 같은 과제를 올곧게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낡은’4·3특별법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4·3특별법 개정운동에 도민 역량을 결집해야 할 때다”고 강조했다.
그는 “도내 4·3관련 단체들과 9월 정기국회 상정을 목표로 4·3특별법 개정안 마련 논의를 모아나가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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