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전 제주를 붉게 물들이며 제주도민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상처를 남긴 제주4·3의 흔적은 제주에만 있지 않았다.

수형인이란 이름으로 무기 징역형에서 1년형까지, 서울 서대문에서 마포, 인천, 대전, 대구, 목포, 김천, 부산, 마산, 진주 등 전국의 형무소에서 한국전쟁 발발 직후 대부분 학살당했다.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가 29∼30일 이틀간 찾아 나선 4·3유적지는 부산과 마산·진주 옛 형무소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부산형무소는 불법 군사재판에서 15년형을 선고받은 499명의 도민들의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한국전쟁 발발 전후로 부산형무소로 이감되고, 또 마산·진주 형무소로 이감되는 과정에서 대부분 죽임을 당한 비극의 역사 현장이다.

정부가 지난 2003년 10월 채택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당시 형무소에서 옥사 또는 병사한 희생자의 명단 일부를 적시하고 있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집단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번 순례단에는 57년 전 불법 체포·구금·재판에 의한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살아남은 고봉원(78·남군 남원읍)·고윤섭씨(78·제주시 봉개동)가 동행,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기도 했다.

“우리는 그저 굶주리고, 뼈만 붙어 있으니까 재판을 하는 건지, 뭘 하는 건지도 몰랐어. 그저 총살당하는 것을 면하는 것만으로도 고마웠을 따름이었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한 고봉원씨가 지금은 아파트단지로 변해버린 옛 부산형무소 터 앞에서 “나는 살아있어. 이제야 와서 미안하다”며 과거의 아픔기억을 더듬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고봉원씨는 살려고 피신생활을 하다 ‘살려주겠다’는 전단을 보고 산을 내려왔다가 군부대로 끌려갔고, 100여명과 함께 30분만에 인사천리로 끝난 재판에 따라 영어의 몸이 되고 만다. “매일 밤 11시쯤 되면 트럭소리가 나곤 했다. 방 순서대로 얼마씩 태워나가 죽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옆방까지 다 태워갔는데 더 이상 부르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 그만 죽이라고 한 것이었다”. 부산형무소로 이감된 뒤 죽는 순간을 필할 수 있었던 데 대한 고봉원씨의 기억이다.

마을이 소개되면서 가족들은 모두 피신했지만 움막을 지어 살다 군 토벌대에 발각돼 총상을 당해 지금도 온몸에 4·3의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는 고윤섭 할아버지. 고 할아버지는 군사재판이 아닌 일반재판을 받아 미결상태(항소 중)였기에 살아남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고 할아버지는 희생당한 동료 수형인들에 대한 죄스러움이 더 앞선다고 했다.

옛 진주형무소의 터임을 알려주고 있는 팽나무를 보고는 “당시 팽나무가 그대로 있구먼. 내가 살아서 이곳에 오게 될지 꿈에도 몰랐어. 죽은 사람들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들었는데 진상을 밝혀야지. 그 분들의 원혼을 달래줘야 할 게 아니냐”고 힘주어 말했다.

이번 순례가 남긴 과제 하나. 올 정기국회에서는 ‘4·3특별법’개정안을 반드시 통과, 희생자 범위를 ‘체포·구금, 수형 생존자’로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양동윤 4·3도민연대 공동대표는 “이번 순례는 4·3특별법 개정안의 국회상정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4·3진상규명을 위한 국가의 역할을 다시 한번 각인시키고, 당시 불법재판에 의해 수형 생활을 했던 당사자들의 증언을 통해 희생자 범위확대 문제를 공론화 하는 시발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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