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며칠 전 남북정상회담 일정을 마치고 평양 순안공항에서 서로 얼싸안고 석별의 정을 나누는 모습은 55년 분단과 적대에 종지부를 찍고 민족사의 새 전기를 닦는 획기적인 이정표가 될 것 같다.

이 같은 포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회담 도중, 김대통령의 발언 중간 중간에 "나도 섭섭한 게 있는데 말씀을 하겠다"면서 그 동안 남측에 대해 불유쾌하게 생각했던 사항들을 기탄없이 솔직하게 말했고, 아울러 김대통령도 나름대로 북한에 서운한 점을 밝히는 과정을 거쳐 나왔기 때문에 더욱 감동적으로 가슴에 와 닿는다. 김위원장 뿐만 아니라, 북측 안내원들까지도 경제난과 식량부족 등 자신들의 약점을 인정하는 장면도 예전에는 흔치 않는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진정 상대방에게 자기의 약점과 잘못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화해의 포옹을 해야 할 곳은 극렬한 이데올로기 대립의 역사적 현장인 제주 4·3도 예외일 수 없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이른바 무장 게릴라로 좌익활동에 관여했던 이들이 그 동안 매카시즘과 의사소통이 차단된 상황 등으로 굳게 닫았던 입을 '지금' 열기 시작해야만 하고, '지금'이 지나면 이들 중 대부분은 세상을 떠나 다시 입을 열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양민 학살의 또 다른 한 축인 우익 쪽에서도 가해자로서의 4·3 양심선언이 기대된다. 4·3 피해자들의 증언만 일방적으로 무성한 상황에서는 더욱 절실하다. 어느 싸움이든 가릴 것 없이 그것에 관련된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모두 피해자일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싸움은 비극적이다. 그렇지만 특정사건에 관해서는 가해자와 피해자로 갈릴 수밖에 없다.

가까운 예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금기사항으로 여겨졌던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 집단학살에 관한 논의는 양민과 적군의 식별이 어려웠던 베트남전의 특수성까지도 두루 고려한다 해도, 부녀자들과 아이들까지 학살하거나 주검들의 코나 귀를 자른 것을 두고도 게릴라전 탓으로만 돌리기는 어렵다는 지적이다. 당시 참전 장교였던 김기태 대령이 죄책감을 고백한 것도 도에 넘게 무력을 휘둘렀다는 양심의 가책 때문일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한국전 당시 미군이 우리 양민들을 집단 사살한 노근리 사건의 피해자 가족들이 가해자 증언을 전제로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것을 우리는 당연하다고 여긴다. 이것을 바꾸어 생각하면, 베트남전의 피해자나 이와 상황이 흡사한 4·3 피해자들의 처지도 물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50년간 남북한 사회를 지배해왔던 '이데올로기로서 남북분단'을 애기할 때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것 중 하나가 북측에서는 '공산당은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믿음과 '인민군은 언제나 옳고 남쪽의 그들은 사악하다'는 선전이었다. 이에 이념적으로 대항해야 했던 남쪽에서는 국군이 '정의의 군대'이고 인민군은 그 정반대라는 믿음이었다. 이 믿음은 남북한 모두가 자신의 체제 정당성을 구성원들에게 설득하는 주요한 기제로 작용했고, 급기야는 민간인까지 학살하는 결과를 낳게 만든 셈이다.

그러나, 남북한 사이에 화해의 물꼬가 트이고, 베트남전인 경우에는 참전장교의 증언까지 나온 마당이라면, 4·3 양심선언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할 때가 오지 않았나 싶다. 다만 이 문제는, 참전 군경들의 명예에도 관련된 사안인 만큼 신중하게 접근하여야 함은 물론이다. 이에 따른 책임문제 등 우려되는 파장에 대해서는 4·3특별위원회에 의해 사전 면책규정을 마련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진정한 양심선언이라면 진즉, 피해자들의 슬픔도 분노도 생생할 때 지금 이루어져야만, 가해자의 입장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워질 것이다.<양석완·제주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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