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나오코 ‘프란게 문고 내의 재일 조선의 발행신문에 나타난 제주4·3 인식’ 논문]

제주4·3사건 당시 초토화작전으로 제주도민들이 학살되던 와중에 일본에서는 제주출신 동포들이 삼삼오오 모여 마을별 추도회를 열었던 것으로 밝혀져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제주4·3연구소(소장 이규배)가 24일 발간한 「4·3과 역사」 제5호에 실린 무라카미 나오코(츠다주쿠대 대학원 박사과정·국제관계 전공)씨의 ‘프란게 문고 내의 재일 조선의 발행신문에 나타난 제주4·3 인식’이라는 논문에서 밝혀졌다.

제주출신 재일동포들의 4·3에 대한 인식을 연구하고 있는 무라카미씨는 논문 작성을 위해 1948∼1949년 10월까지 재일동포들이 발행한 27개 신문에서 400건이 넘는 4·3관련 기사를 분석했다.

논문에 따르면 재일 조선인이 발행한 신문 가운데 처음으로 4·3사건을 보도한 것은 1948년 4월7일 ‘제주도에서 선거반대 대폭동 발생’(조선정보, 조선특신) 제하의 2개의 기사로 남한에서 최초로 보도된 4월6일과 비교해 거의 동시에 보도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남한에서 보도가 완전히 통제됐던 토벌대의 초토화작전 기간인 1948년 11월 중순부터 1949년 10월말까지는 남한에서 보도되지 않은 제주상황까지 보도됐다.

이 시기 보도특징에 대해 무라카미씨는 △제주도에서 펼쳐진 군경의 초토화전술로 인한 민간인학살 피해상황 보도 △이승만 정부가 제주도에 선포한 계엄령 하에 전개됐던 초토화작전에 대한 비판적 견해 △인민의 무장항쟁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둔 보도로 요약했다.

특히 4·3당시 발생한 양민학살 소식이 일본사회에 알려지면 제주출신들의 집단거주지역인 오사카 이쿠노에서 ‘재판(在阪) 제주도 대정면 친목회’가 1949년 1월3일 개최한 ‘인민학살 반대 추도회’를 시작으로 화북·조천·북촌·신촌·함덕·한림·삼양 등 출신 마을별로 추도회가 열렸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와 함께 1949년 2월1일에는 ‘재판(在阪) 구좌면 친목회’가 오사카 이마자토에서 추도회를 열었고, 도쿄 아라카와에서도 같은 해 5월29일에 애월면 고내리 청년단 주최로 제1초등학교에서 300여명의 동포들이 참가한 가운데 추도회를 개최했다.

무라카미씨는 “일본에서의 4·3관련 기사는 외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평양 발 방송 및 통신을 인용, 군경의 초토화작전을 비판적으로 보도하는 경향을 보였다”면서 “특히 게재한 기사내용과 제목을 통해 각 신문의 4·3에 대한 인식과 경향, 평가 등을 엿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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