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4ㆍ3해결을 위하여] <1>살아남은 자의 슬픔 ‘수형인’

지난 2002년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고 대통령이 공식 사과하는 등 4·3문제 해결을 위한 한 단계 진전이 있었다. 하지만 4·3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은 이제부터라는 말이다. 2006년에도 또 다시 4·3을 노래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완전한 4·3해결을 위한 과제를 3회에 걸쳐 싣는다.

“굶주리고, 뼈만 붙어 있었으니까 재판을 하는 건지, 뭘 하는 건지도 몰랐어. 그저 총살당하는 것을 면한 것만으로도 고마웠을 따름이었지”.

58년 전 불법 체포·구금에 이은 재판까지,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살아남은 고봉원 할아버지(79·남제주군 남원읍)가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고 할아버지는 4·3당시 살려고 피신생활을 하다 ‘살려주겠다’는 전단을 보고 산을 내려왔다가 군부대로 끌려갔고, 100여명과 함께 30분만에 인사천리로 끝난 재판에 따라 영어의 몸이 되고 만다. “매일 밤 11시쯤 되면 트럭소리가 나곤 했다. 방 순서대로 얼마씩 태워나가 죽인다는 것이었다. 도살장이나 다름없었지. 그런데 우리 옆방까지 다 태워갔는데 더 이상 부르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 그만 죽이라고 한 것이었어”. 부산형무소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고 할아버지의 기억은 너무나 생생하다.

수형인에 대한 희생자 결정이 속속 이뤄지고 있지만 고 할아버지와 같은 생존‘수형인’은 희생자가 될 수 없다. 명예 회복은커녕 아직도 ‘빨갱이’꼬리표가 따라다니기까지 한다.

현재까지의 4·3희생자는 ‘4·3사건으로 인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자 또는 후유 장애가 남아있는 자’다. 똑같이 불법적으로 체포·구금됐더라도 죽거나 행방을 알 수 없으면 희생자가 되지만 살아 있으면 희생자로 결정되지 못하는 모순을 낳고 있다.

살아 있는 4·3의 역사이자 실체지만 진상규명에는 사각지대로 방치되고 있는 셈이다.

제주4·3연구소는 고 할아버지와 같은 생존 수형인을 150명 내외로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일반재판을 통해 1∼2년의 단기형을 선고받아 복역했거나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 의해 옥문이 열리면서 출감한 경우까지 포함하면 규모는 훨씬 커질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 의해 풀려난 수형인들은 정부가 ‘탈옥수’로 규정하고 있어 진상규명은커녕 ‘역사왜곡’까지 일삼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제는 이들 생존 수형인들까지 희생자 범위로 끌어들이는 작업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아울러 ‘불법’재판과 그로 의한 수형 실태 등에 대한 진상조사를 통해 역사를 제대로 복원해야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현재 국회에 계류중인 4·3특별법 개정안에 희생자 범위를 ‘구금된 사실이 있는 자 또는 수형자’까지 확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양동윤 4·3도민연대 공동대표는 “죽은 자는 희생자로 결정되는데 옥살이 후 살아 돌아온 사람들은 지금까지 진상규명의 사각지대로 방치해왔다”면서 “이들이야말로 살아있는 4·3의 실체라는 점에서 희생자 지정으로, 역사복원의 당당한 주체로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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