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 국가는 또 무엇인가. 58년 전 제주섬을 온통 피로 물들였던 4·3사건의 비극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의문이다. 1948년 11월 불법적인 계엄령과 동시에 진행된 ‘토벌작전’은 제주섬을 글자 그대로 초토화시켰다. 군·경 토벌대는 중산간마을을 깡그리 불태웠고, 70대 노인에서부터 젖먹이 어린아기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무차별 학살했다. 국민을 보호해야할 국가에 의해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 가량인 3만명의 소중한 목숨이 희생된 것이다.

4·3사건은 오랫동안 말해서는 안되는 ‘금기의 벽’에 갇혀 있었다. 정권은 이 엄청난 사건의 진상을 은폐·왜곡했다. 유족들은 억울하다는 하소연 한 번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혹은 형이 토벌대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연좌제의 멍에’를 써야했다. 1960년 4·19혁명에 힘입어 유족들의 한을 풀 기회가 있었지만, 이듬해 발생한 5·16쿠데타는 진상규명 운동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다.

5·16쿠데타 이후 무려 17년간 계속된 ‘강요된 침묵’은 한 소설에 의해 깨졌다. 엄혹했던 유신 시절인 1978년 잡지 ‘창작과 비평’에 발표된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은 4·3의 참혹상과 그 후유증을 다뤄 지식인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긴 세월 금기시됐던 4·3사건 진상규명의 물꼬를 트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작가는 곧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고, 소설집은 판금조치를 당했다. 그 후 오랫동안 누구도 4·3사건에 대해 입을 열지 못했다.

장기 군사정권을 청산하기 위해 온 국민이 떨쳐 일어섰던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4·3사건 진상규명에 자극제가 되었다. 그 해 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평민당)는 정치인으로서는 처음으로 ‘4·3 진상규명’을 공약으로 내걸었는데, 그 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국민들은 4·3사건에 대해 알지도 못했다. 이와 관련, 1992년 4·3사건 취재를 위해 제민일보를 찾아왔던 일본 요미우리 신문은 특집기사에서 “4·3사건에 대한 재평가는 중앙의 민주화 수준과 비례할 것”이라고 썼다.

이처럼 오랜 상처가 안으로만 곪아가고 있을 때, 제민일보는 1990년 창간과 동시에 ‘4·3은 말한다’를 연재함으로써 4·3사건을 정면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이 연재는 1999년 8월까지 무려 10년간 456회나 계속됐다. 이는 5권의 책으로 묶여졌고, 일본어로도 번역돼 출판되었다. 언론사상 유례없는 장기 연재였고, 이에 대해 한국기자협회는 최고의 점수로 ‘한국기자상’을 주었다.

민간인 대량 학살이라는 국가 공권력의 잘못에 대해 국가 스스로가 처음으로 진상규명에 나선 것은 2000년 ‘4·3특별법’이 제정 공포되고 ‘4·3위원회’가 출범하면서부터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4·3 진상규명’ 공약이 비로소 지켜진 것이다.

4·3위원회의 활동은 참여정부까지 계속 이어져 2003년 10월 15일 ‘진상조사보고서’가 공식 채택됐다. 그러자 노무현 대통령은 며칠 뒤인 10월 31일 4·3사건 당시 국가공권력의 잘못에 대해 사과했다. 50여년간 맺히고 쌓여왔던 한이 녹아드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오늘 열리는 제58주기 4·3위령제는 또한번 새로운 전기가 될 전망이다. 4·3사건의 야만과 비극이 화해와 상생의 정신 아래 ‘평화와 인권’이라는 인류보편의 가치로 승화되는 감격스런 순간이 될 것이다. <고두성 / 논설위원 겸 경영전략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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