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달 4월!
영령들이시여!

오늘 우리는 평화롭고 순박한 이 땅에 피 맺힌 원한을 간직했던 4·3이 발생한지 어언 쉰여덟 번째를 맞아, 돌아가신 영혼들을 추모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 동안 위령제를 위해 매년 탑동 광장이나 신산공원과 종합운동장 등을 전전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곳 광활한 봉개벌에 평화공원의 성스러운 성지를 정성스럽게 마련하기까지는 중앙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도민들의 커다란 밑받침이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또한, 아직 국회에 계류중이지만 조만간 4·3특별법 개정으로 반세기 넘는 장구한 세월동안 역사 속에 묻혀있던 진실을 밝히고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길도 열리리라 확신 합니다.

이제 영령들의 넋을 신원하면서 4·3유족들 마음속에 모두가 가슴이 설레는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어쩌면 한 세대 가까이 모진풍상에 짓눌리고 가슴속에 풍화된 탓입니까.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 유족들은 ‘잠자고 있던 4·3’을 ‘생각하는 4·3’이 되도록 일으켜야 합니다. 하면 된다는 제주人의 끈기가 어쩌다가 장구한 세월동안 침묵을 지켜야만 했습니까. 암흑 속에 묻힐 것 같았던 세계사적 비극인 이 전대미문의 발단은 무엇이며 주모자는 누구입니까. 어째서 평화로운 이 섬에 학살의 광풍이 몰아쳐야 했습니까.

수많은 제주人들이 무엇 때문에 잔인하게 죽어야만 하는지 왜 이 고장이 피바다가 되어야 하는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죽어갔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러한 비극을 되새기며 앞으로의 제주人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차분히 생각해봐야 합니다.

과거 학살의 시대를 마감하고 미래를 위한 핵심이 무엇인지 우리 각자는 냉철한 이성으로 생각해 봐야 합니다. 보다 넓고 깊은 역사적 안목으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내다봐야 하겠습니다.

애석하게 죽은 영혼들을 위해서도 더 이상 恨풀이를 하지 말고 보다 바람직하고 보람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 이성적으로 찾아야 할 때입니다.

우선 4·3으로 인한 도민 간 갈등과 분열 구조를 과감히 탈피하고 제주 공동체를 이루는 토양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유족 스스로가 도민 대통합을 위해 환골탈태의 아픔으로 이 땅의 새로운 제주人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더 이상 4·3으로 인한 도민 간 불신으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기에는 우리 유족들의 할 일이 너무 많고 나아가는 길이 바쁘기만 합니다.

이제 개인적인 이기심을 버리고 대승적 차원에서 작금의 문제점들을 함께 풀자는 의기투합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주의 망상에서 벗어나 대의를 추구하는 통 크고 합리적인 참사람 제주人다운 제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한없이 원한에 맺혔던 유족들부터 역사 앞에서 비켜서거나 표류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지역사회를 위해 힘을 합치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온 도민의 추모의 정을 모아 4·3영령들의 명복을 비옵니다. <고태호 / 제주4·3봉행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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