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귀숙 지음 ‘기억의 정치’

사회학자 권귀숙씨(제주대학교 출강. 탐라문화연구소 연구원)가 제주 4·3을 분석하면서 개인적이고 주관적으로만 여겨지는 기억이 정치적·문화적 산물임을 밝힌 책「기억의 정치」을 냈다. 기억은 단순히 한 개인의 경험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할 만한 것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공유하면서 한 사회의 전통이 된다.

이러한  ‘기억의 정치학’에 관한 연구는 국내에서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역사와 구술사와 달리 기억에 관한 연구는 한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역사적 사건에 관한 기억이 형성되는 과정을 다양한 사회 관계망을 통해 추적함으로써 현재의 필요에 의해 과거가 재창조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따라서 저자는 기억을 하나의 정치사회적 현상으로 인식하고 대량학살의 한 사례로 제주 4·3을 선택했다. 제주 4·3은 40여 년간 공개 토론이 금지돼 왔으며, 진상 규명이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였고, 따라서 기존 연구들이 주로 여기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지금까지 다뤄지지 않았던 체험자들의 사회적 기억을 중심으로 그들이 어떻게 4·3을 바라보며, 어떤 기억을 강조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있다. 즉 생존자의 기억을 통해 제주 4·3의 진상을 재조명하거나 4·3을 재해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제까지 밝혀진 진상, 공식 기록, 또는 지배 담론에 가려 드러나지 않았던 보통 사람들의 4·3을 이해해보려는 것이다.

또 이러한 기억들이 4·3을 체험하지 않은 세대에게 어떻게 전수되고 받아들여지는지 분석하여 우리 사회에서 역사적 사실에 관한 기억들이 어떤 방식으로 전해지고 영향력을 미치는지 짐작할 수 있도록 해준다. 더불어 국가 권력에 의해 억압되었던 기억들이 영상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지는 과정과 영상에 드러나는 남녀의 이미지를 분석함으로써 문화적 재현물이 어떻게 우리의 기억에 개입하는지까지 연구의 폭을 넓히고 있다. 문학과지성사·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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