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2월16일 한 여성의원이 국회 본회의 단상에 올랐다. 그녀는 여야 의원들을 향해 외쳤다. “피해자 규모조차 알 수 없는 제주4·3의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는 것은 우리들 후대의 의무다. 4·3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특별법 제정은 여야가 굳게 약속했던 일이다”.

순간 본회의장은 술렁거렸다. 일부 의원들은 “4·3의 성격을 자의적으로 재규정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범죄”라며 맞받아쳤다.

당시 정기국회 막바지에 제출된 4·3특별법의 통과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특히 여야간 극심한 정치공방에다 극우세력의 방해공작까지 가세한 상황이었다. 법 제정은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 있었다. 여야가 그녀의 손을 들어줬다. 4·3발생 반세기만에 특별법이 제정된 역사적 순간이었다.

우리는 그녀를 ‘추다르크’라 불렀다. 오를레앙 전투에서 기적 같은 승리를 이끌면서 프랑스를 구한 잔다르크를 연상케 한다.

비약적으로 1400년대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100년 전쟁을 벌인 프랑스가 ‘4·3피해자’라면, 프랑스 북부지역을 점령하고 왕위 대관식 거행 장소인 랭스까지 접수한 영국은 일부‘극우세력’이었다.

그러나 이후 추다르크는 잔다르크의 후반부 삶에 발목이 잡혀있다. 잔다르크는 오를레앙 전투의 승리로 영웅이 됐지만 정치권의 질시를 한 몸에 받았다. 결국 잔다르크는 1430년 5월 콩피에뉴 전투에 나섰다가 영국군에 사로잡혀 화형에 처해졌다.

추다르크도 2004년 4월 총선에서 낙선했다. 그녀는 참여정부 탄생의 ‘1등 공신’이자 유력한 차기 대권후보였다. 분당 과정에서 중도파를 규합하는 등 민주당을 지켰다. 그러나 총선때 광주에서 삼보일배하며 민주당의 부활을 꿈꿨지만 탄핵의 후폭풍을 비켜가지 못했다.

추미애 전 의원이 다시 돌아온다. 2004년 8월 미국 유학길에 오르며 쓸쓸하게 정계 무대에서 퇴장했던 그녀였다.

국회에 계류중인 4·3특별법 개정안의 처리가 부지하세월이다. 여야와 정부의 입장차를 해소하는 게 관건이다. 4·3특별법 개정을 해결할 ‘제 2의 추다르크’탄생을 기대한다.<이태경·정치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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