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 가까이 사는 이웃이 먼 곳에 사는 친족보다 도움을 많이 준다는 뜻으로, ‘이웃사촌’ 이라는 말이 있다.
오늘날 빠른 속도로 사회가 변화하고 있는 시대에 이웃 나라들의 동태가 하수상하다. 일본이 ‘새로운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에서 군국주의와 아시아 침탈을 정당화하는 역사 교과서를 만들어 우리를 당혹하게 만들었는데, 중국도 동북공정(東北工程) 계획으로 우리의 역사를 잠식하려 하고 있다.

 ‘동북공정’ 이란 ‘중국 동북 변경지방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연구’ 작업을 지칭하는데, 2002년부터 2006년까지 5년간 중국 사회과학원 소속 변강사지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이 주관이 돼 추진하고 있다.

연구내용은 고조선·고구려·발해사와 중조(中朝) 관계사 연구인데, 이것이 우리에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고조선, 고구려뿐만 아니라 발해에 관한 역사까지도 중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는 내용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웃나라들이 다투어 역사를 왜곡하는 저의는 어디에 있는가? 동북아 지역의 전략적 가치가 증대함에 따라 한반도에 대한 역사적 연고권을 미리 주장해 둠으로써 북한의 변화나 남북통일 등 미래의 상황 변화에 대비해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국익을 도모하려는 의도가 숨어있을 수도 있다.

일본의 가정에서는 어릴 적부터 예의바른 말을 쓰도록 습관을 들이고, 남에게 피해 주지 말라 남의 집에 함부로 방문하지 말라는 교육이 잘 이뤄지고 있으며, 사회적으로는 ‘오아시스’ 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하이오고자이마스(안녕하세요), 아리가도고자이마스(감사합니다), 시쯔레이시마스(실례합니다), 스미마셍(죄송합니다). 이 오아시스 운동이다.

그렇다면 일본인은 과연 예의바르고 친절한 사람들인가? 오늘날 독일이나 프랑스 정부는 과거 침략전쟁에 대해 진실을 부단히 추적하면서 과거사 반성과 정리를 하고 있음에 비해, 일본은 국정을 책임지는 관료들이 신사참배를 하면서 이웃 나라들의 심사를 불편하게 하고 있다.

루스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에서 일본인들은 예술가와 배우를 우대해 국화를 신비롭게 조형하기도 하지만 반면에 무사정신이 있어 칼로 남의 생명을 해치기도 하는 것을 비유, 인격의 이중성을 지적했었는데 불현듯 이 책이 생각난다.

한·일간 역사인식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한국인들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고 인식하고 있는데 비해 일본은 그에 대한 가해의식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는 데에서 발생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물론 일본 내에서도 일부 시민들은 자국의 이러한 역사왜곡에 대해 비판을 하고 있기도 하다.

중국은 북한과는 우호협력, 우리와는 호혜협력으로 남북관계의 균형을 취하면서도 미국 주도의 새로운 동북아 질서를 견제하려는 화평굴기(和平起) 전략을 펴고 있는 것으로 추리할 수 있다.

이웃 나라들의 역사 연구 동태를 지켜보는 우리들의 마음은 조용한 분노 속에 서글픔이 있다. 그러나 이를 감정적 일시적으로 대응할 일은 아니다.

보편적 이성으로 냉철하게 대응할 일이다. 일찍이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역사가는 개인이면서 사회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주관의 개입을 막을 수 없고 정부의 전략전술을 배제하여 독야청청 해주기만을 기대할 수도 없지 않은가? 철저하게 객관적이어야 할 사실들은 이래저래 분장되기 마련이 아닐까. <김철호 / 탐라교육원 교육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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