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목포형무소 터 찾은 '4·3유적지 순례단'
주정공정터 퍼포먼스, 형무소서 진혼제

   
  4일 목포시 옛 목포형무소 터 석산에서 진공스님 주재로 열린 천도제.
   
 
"난산리에서 7명이 함께 목포형무소로 왔다. 같은 동네 사람들이다보니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보며 안부를 물었는데 1949년 목포형무소 탈옥사건 이후 아무도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이 자리에 오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57년전 이맘때 다.

1년 징역형을 받고 목포형무소에서 수감중이던 김두황 할아버지(80.성산읍 난산리)는 49년 목포형무소 탈옥사건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모두가 기적이라고 했다. 끔찍한 기억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일까. 형을 마친 이후 김 할아버지는 한번도 이곳을 찾은 적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57년만에 다시 찾은 이곳에서 김 할아버지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것조차 죄스러운 듯 눈시울을 붉혔다. 그날 이후 수장됐는지, 총살됐는지 여전히 생사조차 모르는 동료들이 눈앞에 어른거리면서다.

4·3도민연대가 이끄는 '4·3유적지 순례단' 이 4일 600여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옛 목포형무소 터를 방문했다. 오전 7시30분 옛 주정공장 터에서 집결, 목포형무소로로 끌려갔을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재현하며 배를 타고 목포항으로 도착한 터였다.

2001년에 이어 두번째로 방문한 목포형무소터는 이미 고층 아파트들로 빽빽히 채워졌다. 다만 일제시대부터 처형장소로 쓰였다던 뒷산 곳곳에 파헤쳐진 묘비명만이 누군가의 죽음이 있었음을 알려줄 뿐이다.

   
 목포형무소에서 부친을 여윈 홍성수 4·3유족회
  상임부회장(좌)과 목포형무소 증언자 김두황  
  할아버지.
현재까지 옛 목포형무소에서는 4·3당시 90명 생존, 114명이 희생됐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 이외의 500여명에 달하는 도민의 희생에 대해서는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4·3유적지 순례단은 이날 오후 3시30분 옛 목포형무소 뒷산에서 당시 희생된 114명의 신위와 희생의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500여명의 영령을 위로하는 천도제 등 ‘목포형무소 수형 희생자를 위한 진혼제'를 가졌다.

특히 이날 진혼제에서는 목포형무소로 끌려온 500여명의 생사가 여전히 밝혀지지 않는 등 여전히 미해결 과제가 산적한 4·3진상규명의 조속한 추진을 바라는 성토의 목소리도 이어졌다.

참가자들은 "추가 진상규명이라는 알맹이 없는 4·3특별법 개정안이 여전히 국회에서 표류하고 있다"며 꼬집는 한편 "누구는 4·3이 다 해결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수장된 5000여명의 희생자 등 여전히 진상규명, 4·3의 해결과제는 쌓여있다"고 입을 모았다.

또 목포형무소에서 부친을 여읜 홍성수 4·3유족회 상임부회장은 '2001년에 이어 2003년에도 이곳을 방문, 당시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현지조사를 해왔다"며 "당시 형무소 간수 등을 만나면서 뭐 하나라도 찾아보려고 했는데 뜻대로는 되지 않았다"고 부친 죽음의 진실을 밝히지 못했음에 말을 잊지 못했다.

특히 홍 부회장은 "일제시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야 했던 형무소 뒷산이 개발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역사적인 현장을 무조건 개발하려는 한다는 점에 분노해야 한다"며 행정당국의 관심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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