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들만이 아는 못. 밴벵듸물. 그러나 지금은 송전탑을 세우기 위해 못 가운데로 길이 뚫리면서 태고의 흔적을 잃었다.


◈흐린내·밴벵듸물(조천읍 선흘2리)


 선흘2리 선인동 지경 선흘목장내에 자리잡은 흐린내는 탁류에 진흙과 수초가 어우러져 오래된 늪처럼 풋풋한 냄새가 그득하다.

 촘촘한 가지를 늘어뜨리며 구렛나루 같은 잔뿌리를 드러낸 왕버들은 바람막이를 하며 늪의 오수를 걸러내고 있다.

 이 일대는 텃새들이 둥지를 트는 자연 생태공원이나 다름없다.

 덩굴나무와 잡풀 덤불은 텃새들의 보금자리.알에서 깨어난 지 몇 달안된 참새가 푸드덕 거리더니 풀속에 숨어있던 꿩들도 가끔 괴성을 지르며 먼산으로 날아간다.

 이 일대는 양서류가 많다.주변이 잡목과 가시덤불로 둘러싸여 인적이 끊긴 지 오래이기 때문에 참개구리와 유혈목이,살모사 등이 서식한다.

 살모사는 새끼를 뱃속에서 키워 알 상태로 분만을 한다.새끼는 곧바로 껍질을 깨고 돌아다니는데 어미는 지쳐서 꼼짝않고 있으니까 옛사람들은 새끼들이 어미를 죽였다고 생각했다.

 살모사라는 이름은 잘못된 것이지만 다른 측면에선 생태를 눈여겨 보고 지은 것이라 할수 있다.

 취재팀은 이번 흐린내에 대한 취재과정에서 살모사가 서식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성체의 몸이 비교적 짧고 굵은 편.정수리는 암갈색의 무늬가 뚜렷하며 목부분까지 연장돼 있는 게 영락없이 살모사다.

 혐오감 보다는 생태계의 중요한 고리이기 때문에 보호돼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카메라를 들이댔다.

 흐린내의 물줄기는 대개 우진동 지경의 ‘우진제비’오름(표고 411m·비고 100여m)에서 선인동을 거쳐 내려온다.이곳에는 버드나무와 잡목으로 둘러싸인 40평 가량의 못과 함께 한때 목욕통으로 활용됐던 6평가량의 못이 있다.

 이 일대는 오랫동안 인적이 끊긴 탓에 속(俗)의 세월을 뛰어넘은 태고의 흔적을 담고 있는 듯하다.물과 숲이 하나가 된 수면.물속으로 구름 하나가 지나갔다.

 목욕통은 선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을수 있는 생활문화유산이다.그러나 관리가 전혀 이뤄지지 않아 가시덤불과 잡목에 가려 꼼꼼히 살펴봐야 그 형체를 알수 있다.

 큰 비가 내려 내가 터질때면 흐린내의 진면목이 드러난다.3000여평의 들녘이 거대한 호수로 변한다고 한다.

 주요 식물로는 참나무·팽나무·마디풀·소리쟁이·미꾸리낚시·물고추나물·떡윤노리나무·골풀·곡정초·물달개비·가막살이·개망초·찔레·한련초·쥐꼬리망초·밭둑외풀·쥐깨풀·누리장나무·수크렁·송이고랭이·세모고랭이·참방동사니·토끼풀·피막이·선피막이·좀어리연꽃 등이 있다.

 웃밤오름 남쪽 한양목장내에 자리잡은 밴벵듸물은 새들만이 아는 못이다.진입로 주변에 삼나무가 빽빽하게 자리잡아 일단 숲에 들어서면 방향을 잃고 말기 때문.대낮에도 앞이 안보일 정도다.

 특히 축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인적마저 끊겨 못 주변은 가시덤불로 둘러싸여 있고 뱀이 자주 나와 마을사람조차 다니기를 꺼려한다.

 제주환경운동연합 조사결과 밴벵듸물 주변에는 구실잣밤나무와 팽나무,왕모시,역뀌,미꾸리낚시,떡윤노리나무,상동나무,쥐똥나무,사위질빵·물고추나물·누리장나무·병풀·질경이·좀어리연꽃·솔비나무·찔레·돌가시나무·가락지나물·쥐깨풀·물부추·택사·골풀·가막살이·쑥·쑥부쟁이·곡정초·개수염·띠·조개풀·수크렁·송이고랭이·세모고랭이·참방동사니·알방동사니 등이 서식한다.

 기자는 지난 98년 여름 이 일대에 대해 두차례에 걸쳐 생태조사를 벌인 바 있다.한차례는 마을사람의 안내를 받아 못의 위치를 알아냈고 다른 한차례는 아쉽게도 길을 잃어버려 발길을 돌려야 했다.

 길을 잃었던 기억 때문에 이번 취재에는 김희용할머니(74)가 동행했다.선흘2리 주민가운데는 72년 1차·2차 양잠단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외지에서 온 주민들이 많다.토박이는 별로 없다.김 할머니도 31년전 이곳에 와 정착을 했다.

 김 할머니는 “옛날에는 이 일대가 민짝 해나신디(너른 벌판이었는데),낭들(나무)을 많이 싱거부난(심었기 때문에)….베염(뱀)도 하영(많이) 있고 대낮에도 어둡기 때문에 우막(안개) 낀 날에는 아예 고사리를 꺾으러 이곳에 올 생각을 허지 말아야주”라고 말했다.

 밴벵듸물의 ‘벵듸’는 너른 들판을 의미한다.김 할머니 표현대로라면 밴벵듸물은 ‘너른 들판을 밴 물’이다.

 그러나 지금은 삼나무 숲이 조성돼 ‘밴벵듸’라는 말뜻이 무척 낯설다.

 목장입구에서 900m가량 걸었을까,예전과는 달리 길이 뚫려 있고 송전탑 4기가 눈에 들어왔다.송전탑을 세우면서 한전에서 길을 닦은 듯 싶다.

 안타까운 것은 밴벵듸못이 둘로 쪼개진 것.송전탑을 세우기 위해 못 가운데로 폭 2m가량의 길을 만들었다.못을 돌아 우회하는 방법은 없었을까.

 개발바람이 할퀸 그 자리에 흰뺨검둥오리가 찾아왔다.

 그들은 바뀐 환경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이렇게 중얼거리지 않았을까. “당신들도 물가에 사는 동물이었어. 그걸 잊지 말라구”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속가능한’개발이 아니라 ‘지탱가능한’개발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취재=좌승훈·좌용철 기자·사진=조성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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