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원형 복원’은 철저한 고증과 절차, 엄격한 공정으로 추진되지만, 옛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점은 분명히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문화재 행정에서 원형 복원이란 말을 꺼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재 본 모습을 찾는 사업은 현재 문화재 정비라는 이름으로 추진되고 있다. 문화재의 본 모습을 되찾는 일은 그만큼 신중하고 철저하게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문화재 현장에서는 풀어나가야 할 과제가 적지 않은 듯 보인다. 

△논란 이어지는 성(城) 축조

제주성지(제주도 기념물 제3호)에 대한 정비사업이 한창 진행중인 가운데 제주성을 포함, 기존 정비된 제주의 여러 성에 성의 기본적 방어 구조물인 여장(女檣)시설이 왜 설치되지 않았는가 하는 논란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성가퀴’라고도 부르는 여장은 날아오는 적의 탄환이나 화살을 막기 위해 성벽 위에 낮게 쌓은 엄폐용 담이다.

논란의 핵심은 각종 역사·문헌자료와 정비 실태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 「탐라순력도」의 ‘제주조점’ ‘정의조점’ ‘대정조점’에 그려진 성곽에는 여장 시설이 나타나 있다.

1653년(孝宗 4) 이원진 목사가 편찬한 「탐라지」에도 제주성에 404개의 타첩(여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제주도가 제주의 3성·9진·항파두성, 환해장성 등 성과 봉수 25곳, 연대 38곳 등 제주 방어유적을 조사해 지난 1996년 발간한 「제주의 방어유적」에서도 탐라지의 이같은 대목을 인용하고 있다.

제주시가 현재 제주성지 정비사업을 시행하며 제주성곽을 추가로 복원하고 있지만, 여장 설치는 포함돼 있지 않다.

제주성 등 도내 모든 성 구조물에 여장시설이 없는 것에 대해 행정에서는 정확한 고증이 없다는 의견을 견지해왔다. 성 복원 및 보수는 원형이 많이 보존돼 있지는 않지만, 현재 남아있는 성곽을 근거로 하는 상황에서 여장에 대한 고증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환해장성(제주도기념물 제49호) 정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의견도 이미 여러 차례 제기됐다. 성산읍 온평리 환해장성만 하더라도 당시 남제주군 의회에서 문제를 제기했고,  축성 방법도 원상태와 사뭇 다르다는 견해가 있다.

특히 탐라문화연구소가 지난 1991년 발간한 「탐라문화」11집에 실린 강창언씨의 ‘제주도의 환해장성연구’에서는 새로 쌓아올린 온평리 환해장성의 원래 부분에는 너비 3m, 길이 7∼8m의 계단 시설도 있었다고 기록돼 있지만, 복원된 것에는 없다.

또한 환해장성은 층을 이루지 않고 자연스레 쌓아올리는, 이른바 ‘허튼층 쌓기’로 축성되나 온평리 환해장성의 북쪽 단면은 돌들이 층을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 

화북동 환해장성 중 215m에 대한 정비작업이 최근 마무리됐다. 기존 남아있던 성의 축성법을 분석하고 조사해 쌓았다고 하나 어떠한 평가가 나올지 주목된다.

구좌읍 별방진과 한림읍 명월진 등 정비된 성이 기존 성과 여러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의견도 있다. 균일하게 깎이거나 다듬어진 돌로 성이 이뤄졌고, 돌의 크기도 크고 반듯해서 기존 제주지역 성의 독특한 모습과는 차이를 보인다는 견해다.

당시 사업을 담당했던 공무원은 이와 관련 “(기술과 장비의 발달로) 옛 성보다는 깎인 돌이 많이 사용돼 외관상 차이가 나지만, 세월이 흘려 각진 부분들이 침식되면 자연스럽게 보일 것”이라며 “별방진과 명월진 모두 남아있는 성의 축성법을 분석, 쌓아올렸다”고 말했다.

△지금도 사라지는 문화재

문화재 복원과 정비의 핵심 자료가 될 많은 문화재가 개발의 가속화와 체계적 보전 정책의 미흡으로 그 잔존물 마저 사라지고 있다.

환해장성은 그 대표적 사례며, 제주의 전통주거문화의 핵심인 제주 초가도 마찬가지다.

환해장성은 특히 일정 단위마다 정비작업이 이뤄지고 있다고는 하나, 훼손에 따른 현 실태에 대한 종합조사 등이 이뤄지지 않은 채 방치되고 있는 현실이다.

문화재 정비의 신뢰 여부가 고증자료에 뿌리를 둔다고 할 때, 일종의 고증자료라 할 수 있는 환해장성의 옛 모습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가는 점은 앞으로 체계적 정비가 어려워 질 수 있다는 점을 방증한다.

제주 초가 역시 마찬가지. 자치단체의 문화재 사후관리 부족과 가옥구조 변경 불가능이란 족쇄 때문에 전통초가들이 빈집으로 방치되거나 활용되지 못했던 사례는 문화재 보존이 단순히 보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활용이 가능하도록 하는 제도적 탄력성이 필요하다는 점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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