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험난한 투쟁..지난해 4·3특별법 개정
국회차원 추가조사·추념일 제정 등 갈길 여전

4·3은 공권력에 의한 양민의 학살이라는 단 한줄의 사과를 받기까지 제주도민들은 반세기에 걸친 지난한 투쟁을 거쳐야 했다.
오랜 시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던 4·3이 어느덧 59주기. 내년 60주기를 앞두고 4·3을 고립된 제주만의 역사가 아닌 평화·인권의 역사로 새롭게 쓰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 4·3, 길고 긴 투쟁의 역사

4·3이후 10년간 굳게 다문 입을 연 것은 1960년 4·19혁명으로 한국전쟁·이승만 반공독재체제하의 불만이 표출될 즈음이다.

1960년 국회차원에서 거창·함양양민학살사건에 관한 조사단이 구성되자 제주출신 의원들도 4·3진상사건 문제를 거론, 6월6일 단 하루동안 진상조사를 실시했다.

그러나 다음해 5·16군사쿠데타로 4·3해결의 기대는 순식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졌고, 군부독재 속 4·3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기 위한 폭동으로 왜곡, 논의조차 할 수 없는 금기사항이 됐다.

4·3 진실규명의 물꼬를 튼 것은 1979년 소설가 현기영씨의 「순이삼촌」이다.

이후 1987년 시민항쟁 이후 사회운동권 세력, 문화예술인을 중심으로 4·3이 물밑에서 공론화, 1989년 제1회 제주항쟁추모제가 제주시민회관에서 개최되고 같은 해 4·3연구소가 발족되기도 했다.

4·3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공론화하는 데는 언론의 역할도 컸다.

제주신문은 1989년 4월3일을 맞아 ‘4·3의 증언’을 연재했으나 중단, 제주신문 해직 언론인으로 구성된 제민일보가 창간과 함께 ‘4·3은 말한다’를 지속 연재, 4·3 진상규명에 큰 역할을 했다.

△ 특별법 제정까지

1990년대 4·3해결을 위한 진상규명 운동은 가열차게 전개됐다.

1993년 제4대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가 설치되고, 제주지역총학생협의회는 국회 4·3특별위원회 구성 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군부정권이 퇴진하면서 4·3진상규명을 위한 도민의 목소리는 높아져갔다.

그러나 4·3진상규명운동이 성과를 거두기 시작한 것은 1998년 4·3 50주기를 전후해서다.

1996년 국회 내에서 4·3특위 구성이 발의됐음에도 불구, 보류되다 결국 1998년 3월에야 ‘제주도4·3사건진상규명특별위원회’가 구성됐다.

1999년 도내 24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4·3특별법 쟁취를 위한 연대회의가 출범, 본격적인 특별법 제정운동이 전개됐으며 전국시민사회단체 694인의 선언이 발표되는 등 제주4·3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거세졌다.

결국 1999년 12월16일 제주 4·3특별법이 본회의를 통과했으며, 2000년 1월12일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공포되는 성과를 이뤄냈다.
1960년 정부를 상대로 시작한 입법투쟁이 무려 40년만에 성과를 거둔 길고 긴 투쟁의 역사였다.

2003년 ‘제주4·3사건진상보고서’가 최종 확정됐으며, 같은 해 10월31일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를 찾아 정부수반으로서는 최초로 국가공권력에 의한 비극에 공식 사과하는 감격의 순간도 이어졌다.
지난해 제58주년 제주4·3사건희생자 위령제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공식 참석, 한국현대사의 질곡을 되돌리는 역사적인 행보로 평가받았다.

△ 4·3해결과제 여전히 산적

14개월 동안 국회에서 계류, 진척을 보이지 않던 4·3특별법 개정안이 12월 국회본회를 통과하고, 지난 1월 공포되자 도내 4·3관련 단체는 일제히 환영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법개정과 관련, 아쉬움도 적지 않다. 이번 개정안으로 희생자·유족범위 확대 및 유해발굴·수습, 재단설립 근거가 마련됐다는 점에서 일단 성과가 있는 것으로 평가됐지만 당초 4·3관련단체에서 요구했던 국가차원의 추가진상조사, 국가추념일 제정, 생계곤란 유족지원 등이 포함되지 못하면서 추가 개정이 요구되고 있다.

국가공권력에 의한 희생을 보상하는 차원인 만큼 4·3재단의 기금출연, 추가진상조사, 유해발굴사업, 평화공원 운영에 관한 사항 등 4·3후속조치 전반에 대해 국가의 책임과 의무를 뚜렷이 설정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게 4·3단체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이와 함께 4·3유해발굴사업의 체계적인 추진과 유적지 정비와 관리, 일본 등 타지역의 희생자 추가접수 등 4·3해결을 위한 사후과제는 여전히 산적해있다.

 

"개정 4·3특별법 추가조사 걸림돌"

양동윤 4·3도민연대 공동대표

“제59주기 4·3은 특별법 제정 이후 가장 슬픈 4·3이다. 특별법만 제정하면 될 줄 알았는데 특별법이 추가진상규명에 한계를 지니면서 지금까지 이룩해놓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제59주기 4·3은 너무 암담하다”.

양동윤 4·3도민연대 공동대표는 최근 개정된 4·3특별법에 대해 큰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지난해 개정된 특별법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다. 미진하지만 일정 성과가 있다는 평가가 많지만 개인적으로 특별법 개정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양 대표는 “ 4·3진상조사기간은 딱 2년에 불과했다. 그런데 4·3특별법 개정안은 추가진상조사를 재단에서 하도록 함으로써 4·3추가진상조사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며 “ 4·3재단은 언제 설립될지도 모른다. 실체도 없는 재단에게 추가진상조사가 맡겨지면서 진상조사는 멀어져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 4·3특별법 시행령에서도 나타났듯이 이처럼 국가가 지방정부로 책임을 떠넘기는 상황이라면 4·3은 현재 어디로 갈지를 모른다”며 “60주년을 앞둔 이 시점에서 이제까지 잘 걸어온 4·3해결이 특별법 개정으로 암초에 부딪혔다. 이번 특별법 개정은 많은 이들의 노력과 그간의 성과를 크게 훼손했다”며 비판을 가했다.

양 대표는 또 “4·3유해발굴 사업 역시 과연 누구를 위한 발굴사업인지 가늠할 수 없다”며 “집단학살된 유족이 엄연히 살아 있는데 유족이 참여하지 않는 유해발굴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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