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국회의원들은 개개인이 헌법상 보장된 기관이면서도 의사결정이 자유롭지 못하다.정당정치의 근간이라는 당론에 빌미를 잡혀서다. '국회의원은 거수기(擧手機)'란 비아냥 거림은 여기서 비롯된다.

 당론을 거역하는 것은 곧 항명이요,정치적 사망신고를 의미하기도 했다.우리의 헌정사와 의정사가 이를 웅변해 준다.69년 3선개헌이 붉어져 나오던 와중에서 발생한 '4·8항명 파동'과 '신민당 해산'이 대표적인 사례다.

 4·8항명파동은 권오병문교부장관 해임건의안이 직접적인 계기였다.당시 원내 비주류를 이루던 親JP계 의원들 다수가 야당에 동조,해임안이 가결처리 됐다.최소한 40명 안팎의 여당 반란표가 야당에 가세한 뜻밖의 사건이었다.공화당 총재인 박정희대통령이 대로했음은 물론이다.결국 박대통령의 특명에 따라 반란(?)을 주도했던 양순직·예춘호 의원등 다수가 출당조치를 당했다.

 야당의원이라고 해서 당론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4·8항명파동이 있던 해인 69년 9월,제1야당인 신민당은 당론을 거역한 3인의 자당의원을 응징하기 위해 당을 해산하기 까지 했다.3선개헌 저지 투쟁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성낙현등 현역 세의원이 성명을 내고 개헌 찬성으로 돌아섰기 때문이었다.비록 일순간이지만 신민당이 간판을 내린 것은 당해산시 의원자격이 자동 상실되는 실정법을 이용한 것이었다.그야말로 빈데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태운 격이었다.

 일사분란을 빌미로 국회의원의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구속해 온 당론.또한 정치보복이 두려워 당론에 맹종해온 국회의원들.결국 그것은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를 행정부의 시녀로 만들어 버렸다.물론 순기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야당으로서는 그것이 대여·반독재 투쟁 과정의 불가피한 수단이기도 했다.그러나 대부분은 국민과 국가 이익 이전에 체제유지 또는 집단의 이익을 위한 '전가의 보도'처럼 악용돼온 것이 우리의 헌정사다.

 시대가 달라 져서일까.책임정치의 실현을 위해 '표결실명제'와 '교차투표'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여론과 움직임이 없지 않다.4·13총선에서 대거 국회로 진출한 이른바 386세대 등 정치신인들이 그 주역들이다.과거라고 이같은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하지만 “정치보복을 염두에 두지 않겠다 ”는 그들의 호언에서 그 의지가 달라보인다.당론보다 무서운 여론을 의식한다면 못할 일도 아니니 두고 볼일이다. <고홍철·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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