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편] 초토화작전(하) 사태의 유혈기(1948.10.20~12.31)
[제3장] 초토화작전 ③ - 涯月面

9. 초토화작전 시작 전도적인 학살극(下加里)

99.01.15 제433회
下加里

애월면 하가리는 이웃마을 상가리와 더불어 '더럭'이라는 우리말 지명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마을에 있는 학교 이름도 '더럭초등학교'이다. 조선시대 때 한자로는 가락리(加樂里)라 불렸다. 그런데 가락리가 상가락리(上加樂里)와 하가락리(下加樂里)로 나뉘었고, 그 후 락(樂) 자가 떨어져 나감에 따라 상가리와 하가리가 된 것이다.

1998년 1월 3일 하가리 주민들은 새해 벽두부터 마을회관에 모여 마을명칭 변경 문제를 놓고 진지한 토론을 벌였다. 그날의 회의록에 의하면, 주민들은 마을 이름이 '하가리'로 변경된 이후 좋지 않은 일들이 연거푸 일어났으므로 마을 명을 다시 가락리로 바꾸자고 의견을 모았다(어찌된 영문인지 마을 이름은 바뀌지 않았다). 주민들은 '마을을 존폐위기로까지 몰고 갔던 좋지 않은 일'을 열거하면서 이른바 '육시우영 사건'을 첫번째로 꼽았다.

육시우영 사건이 뭐기에 주민들이 마을 이름까지 바꾸려고 하는 것일까.
1948년 11월 13일 새벽 1시께, 제주읍 외도리에 주둔하고 있던 9연대 군인들이 마을에 들이닥쳤다. 그 시각 동동네 문씨 집안에서는 제사를 끝낸 후 음복을 하고 있었고, 중동네 정기봉의 집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모여 돗추렴한 돼지고기를 안주로 술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토벌대는 우선 환히 불이 켜진 채 사람들이 모여 있는 정기봉의 집을 덮쳤다. 또한 이웃집들에도 들이닥쳐 잠자던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끌어냈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정기봉의 집 등 이웃 14채의 가옥에 불을 지르면서 사람들을 속칭 '육시우영'이라 불리는 인근 밭으로 끌고 갔다.

곧 총성과 비명이 뒤섞이는 아비규환의 처절한 장면이 벌어졌다. 이날의 희생자는 김두천(金斗千, 71) 정기봉(鄭基俸, 67) 이정화(李正和, 여, 59) 양공명(梁孔明, 48) 장순호(張順昊, 45) 임군선(林君宣, 42) 임영언(林榮彦, 42) 윤창국(尹昌國, 41) 장언순(張彦順, 39) 정순아(鄭順兒, 39) 임치완(林致完, 38) 고태식(高兌植, 37) 송유생(宋酉生, 33) 임인원(林仁元, 31) 장기휴(張璣休, 30) 박청량(여, 30대) 고원룡(高元龍, 29) 박군화(朴君和, 여, 27) 정신아(鄭信兒, 27) 강기환(康基煥, 26) 양공언(梁孔彦, 26) 임화봉(林和奉, 26) 고두철(高斗喆, 24) 고순화(高順花, 여, 18) 정도아(鄭道兒, 18) 등이다.

희생자 중 고순화는 만삭의 임산부였다. 고원룡은 목숨이 남아있어 애월리의 병원으로 옮겼으나 이틀 후 결국 숨졌다. 이날 총에 맞고도 구사일생한 오창기(吳昌琪, 당시 20대)의 사례는 '삶과 죽음', '총살당한 자와 군인'이 종이 한 장 차이임을 보여준다. 오창기는 총알이 몸에 박혀 있는 상태로 사태를 견디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해병대 3기'로 지원입대해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다. 총알은 후에 일본에 가서 빼낸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주민들은 어째서 그 '위험한 시국'에 술잔치를 벌이다 희생됐을까.
고내봉 동쪽에 자리잡은 하가리는 일주도로 위쪽으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서 약 160호 가량의 작고 평범한 마을이었다. 4·3이 발발한 후에도 전혀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주민들은 별 걱정없이 남의 집 제사나 술잔치에도 참석했던 것이다.

보름쯤 전에 마을을 다소 뒤숭숭하게 만든 일이 있긴 했다. 1948년 10월말께, 밭에서 일하던 임군보(林君保, 39) 이사만(李四萬, 16, 이명 이석주) 등이 대대적인 수색작전 펼치던 군인들에게 걸려 제주읍 농업학교로 끌려간 것이다. 이들은 끝내 행방불명됐지만 마을 안에서 벌어진 일도 아닌데다 토벌대에게 끌려갔다 오는 일이 흔했던 시절이라, 토벌대가 마구잡이로 주민들을 학살하리라고는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주민 윤성범 옹은 당시를 이렇게 증언했다.

그날 밤 문창하(文彰厦) 씨 댁에 제사가 있어서 당시 구장이던 고창룡(高昌龍) 씨 등과 함께 제삿집으로 가고 있었지요. 가던 길에 보니 정기봉 씨 댁에서는 돗추렴을 하고 있더군요. 주로 '말 구루마'를 갖고 있던 사람들끼리 모인 것인데 인근의 주민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그동안 낮엔 토벌대가 올라와 괴롭히고 밤엔 무장대가 내려와 협조하라며 강요하니 근심걱정이 많았는데 오랜만에 모여 술한잔 하며 마음을 달래자는 것이었지요. 제삿집에 있던 나는 총소리에 놀라 남의 집 '통시'에 빠지면서 허겁지겁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이어 군인들의 포위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내와 아이 두 명을 데리고 마을 동쪽의 속칭 '무남동산'으로 뛰었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동네사람들이 많이 피신해 와 있더군요.

어쨌거나 토벌대는 왜 그때 하가리에 왔으며,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했을까. 이에 관해 해변마을의 우익단체원과 하가리 소사의 아들이 모략을 했다는 설이 회자되고 있었다. 또는 토벌대가 산간마을인 원동에 무장대가 집결해 있다는 정보를 듣고 출동하던 중 그 중간지점인 하가리에 다다랐을 때 주민들이 모여 있자 '폭도 모의를 하는 것'이라며 오해를 해 총살극을 벌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토벌대가 하가리에서 학살극을 벌인 후 곧바로 원동마을로 가서 그곳 주민들도 학살한 점을 생각하면 '오해를 했다'는 후자의 추정이 더 설득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희생자들이 노인과 부녀자를 포함한 평범한 주민들이기에 그 어떤 것도 학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이와 관련, 앞에 증언했던 윤성범 옹은 이렇게 말했다.

모의란 은밀히 하는 것이지, 그렇게 모여 술마시고 떠들며 모의하는 경우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동안 마을에서 총살극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런 학살을 당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요. 예상했다면 돗추렴이 아니라 소 한 마리를 공짜로 준다 해도 희생자들이 그곳에 가지 않았을 겁니다. 희생자들은 모두 그 돗추렴하는 집안에 있거나 혹은 그 집 부근에 살던 사람들입니다.

보다 근본적인 학살 이유는 사건발생 날짜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같다. 사건이 벌어진 '1948년 11월 13일'은 이승만이 불법적인 계엄령을 선포하기 4일 전이며 초토화작전이 막 개시된 시점이다. 중산간 소개령이 내려진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즉 1948년 11월 13일에는 조천면의 교래리·와흘리2구·신흥리에서 무차별 학살극과 방화가 벌어졌고, 안덕면에서도 상천리·상창리·창천리 등 각처에서 비슷한 사건들이 같은 날 벌어졌다.

따라서 학살극은 해당지역을 담당한 군인들이 각각 임의로 벌인 일이라기 보다는 '모종의 계획'에 따라 전도에 걸쳐 진행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른바 '초토화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한편 11월 중순께부터 전도에 걸쳐 중산간마을에 소개령이 내려졌지만, 하가리는 일주도로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덕분인지 그 대상에서 제외됐다. 대신 마을 공회당에 응원경찰 20여명이 주둔하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한달 가량을 숨죽이며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1948년 12월 17일 또다시 주민 고윤하(高侖廈, 36, 이명 고만종) 임정기(林正基, 31, 이명 임치숙) 김은보(金銀保, 29) 문기숙(文基淑, 25) 박창영(朴昌榮, 19) 등이 외도리에서 군인들에게 총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 역시 11월 13일 벌어진 학살극과 마찬가지로 주민들은 도대체 왜 이런 희생이 벌어졌는지 그 인과관계를 알 수 없었다. 그 사이에 총살극의 빌미가 될 만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족들은 1960년 4·19 직후 국회조사단에게 이렇게 신고했다.

4281년 음력 11월17일(양력 12월 17일-필자 주) 제주읍 외도리 주둔 9연대 7중대는 GMC를 하가리에 몰고와서 농장에서 작업하는 양민과 보행하는 양민을 무조건 공비라 칭하고 잡아다 차에 편승시키는 한편 …외도리로 가서 하등 심사도 없이 총살을 감행한 것임.

초토화작전 때는 굳이 총살극의 인과관계를 따지는 게 무의미하다. 마치 '머릿수'를 채우듯 무차별 학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1948년 12월 17일 외도리에서의 총살극에서는 하가리 주민 뿐아니라 고내리·상가리 주민 수십 명도 함께 희생됐다.

이처럼 두차례에 걸쳐 큰 인명피해를 당한 하가리 주민들은 사망 경위가 단순한데다 모두 외도국교 주둔군에게 희생된 때문인지 토벌대장들의 이름을 생생히 기억했다. 주민들은 1948년 11월 13일 사건은 전순기(田舜基) 중위를, 12월 17일 사건은 탁종민(卓鍾民) 중위를 각각 그 책임자로 지목해 국회조사단에게 신고했다.

또한 1949년 3월 23일 마을주둔 응원경찰에게 끌려가 희생된 송두진(宋斗珍, 38)의 유족들은 학살자를 '수도경찰 하가리파견소 소대장 경위 김형봉(金瀅鳳)'이라고 기록했다.

한편 1949년 1월 29일에는 마을 경비를 서던 김길현(金吉賢, 31)이 무장대에게 끌려가 희생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김길현은 앞서 11월 13일 벌어진 육시우영사건 때 희생된 김두천의 아들이어서 가족들의 슬픔을 더했다. 아버지는 토벌대에게, 아들은 무장대에게 희생된 것이었다.

1949년 2월 5일에는 무장대가 습격해 국민학교를 불태우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의 여파로 이 학교 교감인 강순관(姜順琯)이 토벌대에게 희생됐다. 유족들은 수소문 끝에 제주읍 도두리에서 겨우 시신이나마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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