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편] 초토화작전(하) 사태의 유혈기(1948.10.20~12.31)
[제3장] 초토화작전 ③ - 涯月面

10. 주막이 있던 원동 학살방화로 사라져(召吉里)

99.01.22 제434회
소길리(召吉里)

최근 도로포장 사업이 활발히 벌어져 중산간에 새로운 도로가 많이 생겨나고 있는데, 실은 포장만 안됐다 뿐이지 도로는 예로부터 있었다. 일주도로는 '알한질', 중산간도로는 '선반로', 서부산업도로는 '웃한질'이라 불렸다 한다.
애월면 소길리는 선반로 보다는 위쪽에, 웃한질 보다는 아래쪽에 자리잡았던 마을이다. 따라서 소길리는 같은 중산간마을 중에서도 선반로 부근에 위치한 장전리나 고성리에 비해 오지라면 오지라 할 수 있는 약 100여호 규모의 마을이었다.

이 작은 마을에도 초토화작전의 광풍은 험하게 불어닥쳤다. 지난 1997년 제주도의회 4·3특위가 파악한 사망자만 해도 80여명에 이른다.

첫 인명희생 사건은 1948년 8월경 무장대가 경찰가족을 살해하는 사건에서부터 비롯됐다. 무장대는 소길리 대동청년단장이었던 박아무개의 어머니(오씨)와 구엄리 출신 경찰 문아무개의 처남인 고순흠(高淳欽, 20)을 끌고 가 학살했다. 일반적으로 무장대의 영향력 아래 놓인 중산간마을에는 우익단체가 발붙이기 어려웠는데 박아무개는 마을에 대동청년단을 조직해 스스로 단장이 됐다가 무장대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 중산간마을에 대한 토벌이 강화되면서 청년들은 맘놓고 집에서 잠잘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경찰에게 붙잡혀 신엄지서로 끌려가면 초주검이 돼서야 돌아올 수 있었기 때문에 청년들은 '꽃동산'이라 불리던 곳에 늘 망을 세워야 했다.

경찰의 구타는 곧 총격으로 변했다. 1948년 10월 29일 마을에 들이닥친 경찰은 청년들을 찾지 못하자 부녀자를 총살하기도 했다. 이때 희생된 강순아(姜順兒, 여, 50)는 속칭 '황동이굴' 부근에 있는 자신의 밭에서 일하다 총살됐다.

토벌대는 소길리와 같이 해변에서 멀리 떨어진 중산간마을은 일단 '폭도마을'로 규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무장대가 해변마을의 경찰지서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면 소길리는 곧바로 토벌대의 타깃이 된 것이다. 10월 29일 부녀자를 무분별하게 학살한 것도 이틀전 무장대가 애월지서를 습격한 사건의 여파로 보인다.

어쨌거나 도망 다니던 청년들은 1948년 11월 중순께 소개령이 내렸을 때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간의 토벌대의 행태로 볼 때 소개명령에 응했다 해서 무사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길리 주민 중 앞장서 무장대에 협조하던 사람으로는 진아무개와 박아무개가 거론되고 있다. 그런데 이들 뿐아니라 많은 청년들이 소개령에 응하지 않고 피신생활에 들어갔다. 이들은 산간을 헤매며 연명하다 결국엔 모두 토벌대에게 붙잡혔다.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된 후엔 즉결총살 대신 주로 육지형무소로 보내졌는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부분 총살됐다.

그런데 명령대로 소개했다 해서 목숨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1948년 12월 12일에는 소개민 부순두(夫順斗, 32) 임승훈(任升勳, 23) 임상훈(任祥勳, 21)이, 12월 17일에는 이기형(李基珩, 29) 백자인(白子仁, 24)이 총살당하는 등 소개지 각처에서 총살극이 잇따랐다. 임상훈의 여동생은 오빠가 희생되던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우리가족은 하귀리 가문동으로 소개했었습니다. 오빠는 당시 결혼했을 때인데, 처음엔 신엄지서에서 올케를 부르더군요. 아마도 올케가 과거에 다소 활동했던 것 같습니다. 며칠 후엔 오빠마저 신엄지서에 갇히게 됐습니다. 어머니는 매일 밥을 날랐지요. 그런데 하루는 지서에서 '이젠 밥해 올 필요없다'는 겁니다. 오빠는 결국 끌려간지 보름만에 총살된 것인데, 오히려 먼저 끌려갔던 올케는 죽지 않았어요. 그후 신엄지서의 순경이 올케를 데리고 살았습니다.

주민 백윤어 씨는 하가리로 소개했다. 24가호의 주민들이 하가리로 소개했는데 그곳 사람들이 따뜻하게 맞아줬기 때문에 지금도 하가리를 제2의 고향이라 여긴다고 백씨는 말했다. 그러나 백씨는 소개 생활 중 겪었던 위기의 순간들을 이렇게 증언했다.

하루는 소개민을 집합시키기에 나갔더니 하가리 소사의 아들인 고아무개가 나타나더군요. 나는 그와 일제 때부터 알던 사이였는데 당시 토벌대 하수인 노릇을 하며 무고를 일삼았기 때문에 혹시 내게 나쁜 감정을 갖고 있지는 않을까 하여 겁이 덜컥 났습니다. 고아무개는 무슨 감정인지 나의 사촌(백자인)과 처남(이기형)을 부르더군요. 이들은 얼마 없어 총살당했습니다. 그땐 토벌대가 '너 폭도지'하면 그만 폭도가 되는 세상이었습니다. 한번은 고향에 식량을 가지러 갔다가 죽을 뻔했습니다. 황급히 소개하느라 먹을 것을 제대로 챙겨 오지 못했기 때문에 경찰에서는 자신들의 감독 아래 식량을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소를 찾으러 갔다 오던 중 신엄지서 순경들에게 잡혔어요. 그들에게 죽도록 맞은 후 신엄지서로 끌려와 갇혔는데 그곳엔 이미 여러 사람이 잡혀 와 있었습니다. 모두 나와 같은 처지였지요. 그때 신엄리에 살던 외삼촌이 같은 마을 사람을 통해 지서에 손을 썼는데, 그 분이 과거 일본에서 공장을 경영할 때 신엄지서 순경이 그 밑에서 일을 했던 인연 때문에 말이 통한 겁니다. 난 그 덕에 무사히 나왔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죄없이 총살됐습니다. 또 많은 청년들이 소개하지 않았다가 희생됐습니다. 그땐 나도 소개를 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망설였던 게 사실입니다.

한편 소길리 원동마을은 초토화작전이 막 개시되던 1948년 11월 13일 이후 지도상에서 사라져 버렸다(약 15가호 정도가 살았던 원동은 행정구역상 마을을 관통하는 하천을 경계로 동쪽은 소길리, 서쪽은 상가리에 해당한다. 그러나 상가리 지경에는 약 5호 가량만 살았기 때문에 소길리로 취급됐다 한다).

지금은 마을 입구에 세워진 '원지(院址)'라 쓰인 비석만이 한때 이곳에 마을이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지만, 조선시대 때부터 형성된 마을이었다. 제주목(濟州牧)과 대정현(大靜縣)을 잇는 웃한질의 중간지점인 이곳은 나그네가 쉬어 가는 주막이 있던 마을이었다.

당시엔 한 가구만 주막집을 운영했고, 나머지 주민들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평범한 마을이었지만 산으로 오르는 길목에 위치한 탓에 토벌대는 늘 원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 작은 마을이라 무장대로 활동할 만한 청년들 숫자가 적었기 때문에 마을에 온 경찰도 '폭도들에게 협조하지 마라'는 경고만 하고 내려갔을 뿐 주민을 구타하거나 총살하는 일은 없었다. 무장대 역시 이따금 내려와 주민들을 모아 놓고 연설을 한 적은 있지만 소출이 적은 이 마을에 식량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주민들은 비교적 평온하게 사태를 넘기고 있었고, 오히려 아랫마을 사람들이 피난 와 살기도 했다. 또 사건이 발생한 11월 13일에는 대정면에서 제주읍으로 가던 중 원동에 잠시 머물며 쉬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주민들은 군인들이 들이닥쳐 집합시킬 때까지만 해도 큰 위험을 느끼지 않고 그냥 집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토벌대는 원동으로 오기 몇 시간 전에 이미 하가리에서 집단학살극을 벌인 바로 그 군인들이었다.

이날 군인들이 원동에 온 까닭은 부근에 무장대가 집결해 있다는 첩보를 들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군인들이 온 마을을 뒤졌지만 무장대는 없었다. 그럼에도 군인들은 애꿎은 주민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 학살했다. 이 때 군인들이 작전일지를 작성했다면, 이 학살극에 대해 무장대를 사살한 전과(戰果)로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나 희생자의 면면을 보면 그것이 얼마나 잔혹하고 무자비한 학살극인지 금방 드러난다. 이날의 희생자는 50∼60명 가량 되는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중 원동 주민은 이두익(李斗益, 64) 김기용(金己用, 60) 김승홍(金丞洪, 58) 현두병(玄斗柄, 50) 김길홍(金吉洪, 49) 양이룡(梁利龍, 48) 이무생(양이룡의 아내) 고병규(高丙奎, 43) 양정생(梁丁生, 여, 41) 강기송(康己松, 40대) 김유홍(金有洪, 40) 허홍(許弘, 여, 40대) 이달호(여, 36) 강창수(31) 강창권(29) 강창욱(28) 강창욱의 처(25) 김귀환(金貴煥, 28) 양운용(梁雲龍, 28) 김성만(金性萬, 여, 24) 고임생(高任生, 여, 22) 홍성규(洪成奎, 22) 고태원(高太元, 21) 김귀휴(金貴休, 21) 양춘희(여, 21) 강공부(康公富, 20) 현창하(玄昌河, 20) 장봉호(여, 19) 임세옥(任世玉) 고남옥(高南玉, 여, 16) 양춘생(梁春生, 여, 16) 현봉완(玄奉完, 14) 고남주(高南周, 7) 강창욱의 아들(4) 등이다.

고남보 씨는 이날 졸지에 아버지(고병규)와 어린 두 동생(고남옥, 고남주)을 잃었다. 고씨는 열일곱살 때 겪었던 참혹했던 그날을 이렇게 증언했다.

군인들이 후레쉬를 들고 다니며 주민들을 집합시켰으니까 아직 어두웠던 새벽 5시께였을 겁니다. 군인들은 주민들 손을 뒤로 돌려 결박시킨 후 마치 굴비 엮듯 사람과 사람 사이를 밧줄로 이었습니다. 그렇게 마을을 한바퀴 도니까 주민 모두가 묶이게 됐습니다. 나이 들어 거동이 힘든 노인이나 장애인 등 몇 명이 집합 명령에도 불구하고 나오지 않아 무사했지요. 이틀 전에도 경찰과 해변마을 대동청년단이 마을에 온 적이 있지만 아무 일 없었기 때문에 처음엔 큰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군인들은 '폭도가 있는 곳을 가리키라'고 했지만 누가 그걸 알 수가 있어야지요. 우리는 결박당한 채 폭도를 찾아 마을 주변을 이리저리 끌려 다녔습니다. 새벽부터 굶은 채 하루종일 그 짓을 하다 오후 5시경에야 다시 주막집 앞으로 돌아왔지요. 군인들도 처음엔 우릴 죽일 생각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선지 한때 결박을 풀어 주기도 했습니다. 또 '사람을 일렬로 세워놓고 쏘면 9명까지 죽는다'거나, '어른은 끽소리 없이 죽는데, 애들은 두세번 앙앙 울다 죽는다'는 등 실없는 소리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더군요. 그러다 다시 결박당했는데 나는 앞으로 묶였습니다. 그때 군인 한 명이 어디론가 무전을 치더니 '너흰 10분내로 총살된다'고 하더군요. 아마도 연대본부에서 지시가 내려온 모양입니다. 곧 애월리 쪽에서 군인 차가 올라왔지요. 난 급히 결박을 풀어 준비하고 있다가 그들이 서로 경례하는 사이에 숲으로 뛰었습니다. 잠시 후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렸습니다. 군인들은 시신 위로 식량과 이불을 덮어놓고 불을 지른 후에야 가 버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원동은 사라져 버렸다. 그러면 총살을 한 군인들은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고 기록했을까. 현재 한국군의 문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미군 문서인 'G-2보고서'에는 이 날의 사건들이 기록돼 있다. G-2보고서에는 4·3 때 제주의 상황이 시시콜콜 기록돼 있지만, 정작 주민들이 대량학살된 1948년 11월 중순 이후의 사건들에 대해서는 거의 누락돼 있다. 다음의 기록은 몇 개 남아 있지 않은 그 시기의 보고서 중 하나로서 '원동사건'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지연된 보고) 11월 13일 제주도에서 경비대의 작전 결과 행원리에서 무장대(raider) 115명이 죽었고, 937-1133 부근에서 37명의 무장대가 죽었으며, 오등리 부근에서 무장대 4명이 죽었다. 사망한 무장대 중 1명은 경비대 탈영병인 것으로 신분이 밝혀졌다.

무장대 백여 명을 사살하는 '작전'이 펼쳐졌는데도 토벌대의 희생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취재반은 보고서의 내용 중 '행원리에서 죽은 무장대 115명'이 무차별 학살된 마을 주민임을 이미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위 보고서의 내용 중 보고자가 지명을 몰라 좌표(937-1133)만 기록해 놓은 곳을 미군지도를 통해 확인했더니, 정확히 원동 마을을 가리켰다. 60대 노인에서부터 4살난 어린아이까지 포함된 이 날의 무차별 총살이 '폭도들을 사살한 군대의 전과(戰果)'로 둔갑한 것이다.

그렇다면 미군보고서는 왜 양민학살을 무장대 사살로 바꾸어 놓았으며, 마치 제주도에서 대단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것인 양 표현했을까.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토벌의 최고 책임자인 이승만과 미군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는데, 당시 국내외 정세를 살펴보면 '음모'의 냄새마저 난다.

즉 사건이 벌어진 1948년 11월 중순은 집권이후 정치적 위기에 몰렸던 이승만이 여순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반격에 나선 때이며, 미군 측에서는 철수 문제를 둘러싸고 심한 내부 논쟁이 벌어진 시점이기 때문이다.
당시엔 언론의 제주현지 취재가 봉쇄된 상태였기 때문에 미군보고서가 일종의 언론으로서도 기능하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미군보고서는 향후 초토화작전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벌어질 학살극을 토벌의 전과로 호도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혼란상을 과장함으로써 제주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여론조작의 의혹마저 드는 것이다.

한편 구사일생한 어린아이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남의 집 머슴살이 등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1990년 9월 22일부터 이틀간 유족들은 잃어버린 마을 터에 모여 영혼을 위로하는 굿을 치렀다. 그때 유족들은 준비한 유인물을 통해 그간의 한을 이렇게 털어놨다.

무자년 음력 10월 13일 군인들에게 학살당하고 어린 아이들 몇 명만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해변가나 고아원으로 흩어져 살았습니다. 순식간에 부모를 비명에 보낸 아이들은 냉대와 굶주림 속에서 모진 목숨을 부지하며 원통함과 그리운 마음을 가슴속에 꼭꼭 묻고 이제 어언 40대 중년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자나깨나 비명에 가신 분들의 영혼을 달래 드리지 못함을 자식된 도리로서 항상 뼈저리게 안타까와 몸부림치다가 지금에야 비로소 돌아가신 분들의 영전 앞에 무릎을 꿇고 빌고저 위령제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어 유인물은 자신들의 마을 터를 빼앗은 자를 상대로 법정투쟁을 벌일 것임을 밝혔다. 1960년대 정부가 추진하던 대규모 조림사업을 맡아 하던 사람이 원동에 버려진 땅이 있음을 알고 '임야소유권 이전등기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통해 부당하게 자신의 명의로 이전했던 것이다. 이후 수년간에 걸친 소송으로 일부 토지에 대해 승소했지만 주민들은 자신들의 몫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주민들은 브로커 노릇을 하며 소송을 맡아하던 사람에게 당했음을 뒤늦게 깨닫고 또한번 땅을 쳐야 했다.
<4·3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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