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금숙. 주부

며칠 전 제주시 노형동에 위치한 어느 갤러리에서 열리는 퍼포먼스를 보러 갔었다. 사실, 제주에서 퍼포먼스를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그리 많은 것은 아니다. 특히 여성주의적 시각을 가진 퍼포머가 하는 행위예술은 더욱 그러하다. 더레 다이안 현이라는 재미교포가 퍼포머였다. 나이지긋한 여성을 예상했지만 이외로 그녀는 20대 중반의 젊은 여성이었다. 

‘분노의 문제-중독되고 중화되며 신선해지고 정화되다-삶:전쟁터’ 라는 연속적 세 개의 틀로 구성된 이 퍼포먼스는 관중들과의 호흡을 중요시하는 듯했고 무대와 관중석의 경계를 없앤 듯이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공연이 시작되었다. 퍼포머는 하얀 옷을 입은 채 관중들에게 등을 보이고 앉아있다. 그녀의 지시에 따라 우리들은 마음속의 분노를 일깨웠다. ‘우리는 누구에게 분노의 감정을 갖고 있지 않은가. 무언가에 깊은 적대감을 갖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 분노의 감정을 지닌 채 관중들은 한명씩 일어나 무대에 앉아 있는 퍼포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핏물을 연상시키는 물감을 손에 벌겋게 묻히고는 그녀의 등에 자국을 냈다.

여러 사람이 다가갈수록 그녀의 등은 벌겋게 상처 입은 듯 변해갔다. 퍼포머는 등의 상처를 관중들에게 보인 채 벽을 가만히 응시하고 서 있다. 그 모습은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사실 이 퍼포먼스를 보면서 예전에 여성영화제에서 상영했던 오노 요꼬의 행위예술 작품이 생각났다. 무대 위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요꼬는 관람객들에게 한명씩 올라오게 한 후 앞에 놓인 가위를 들고 자신이 입은 옷의 일부를 잘라내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그 동작을 반복해 나간다. 결국에는 거의 벌거숭이가 된 요꼬의 몸만 무대 위에 남는다.

커다란 상처로 얼룩진듯한 모습으로 관중들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요코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눈빛을 보고 있자면 정작 피해자보다는 상처를 가한 이들이 더욱 애처롭고 측은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사실 남에게 가해를 하고 고통을 주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상처받은 영혼일 것이다.

더레 다이안 현의 퍼포먼스도 거의 맥락을 같이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누구나 지나온 세월을 거치면서 마음의 상처를 갖고 산다. 어쩌면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 모두가 상처를 받기도 또 주기도 하는 존재인 것 같다.

퍼포머는 상처 입은 마음을 정화한다는 의미로서 차를 한잔씩 마시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둥그렇게 둘러서서 원을 그리고 양초에 불을 붙인다. 에너지를 모아 서로에게 긍정적인 힘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서다. 마지막으로 모든 사람들이 그 촛불을 함께 끄는 것으로 퍼포먼스는 막을 내렸다.

엄숙했던 갤러리는 공연이 끝나자 활기찬 파티장으로 변했다. 삼삼오오 모여 퍼포먼스 얘기들도 하고 기념사진도 찍고 북적북적하다.

이 공연이 카리스마 넘치고 관중들을 압도하는 분위기를 연출해내지 못했다 하더라도 ‘인간인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라는 화두를 던져주는 기회를 갖게 해주었다는 데에는 이의를 달고 싶지 않다. 상처투성이 인간들에게 위로의 장이 될 수 있는 이러한 공연은 계속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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