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자 생활칼럼, 밀물썰물] 희망의 도서관, 새 옷을 입다

 

 어릴 적 만화방이 생각난다. 집안에 책이라고는 마을에서 배달되는 ‘새 농민’과 보기만 해도 머리 아픈 문교부 마크가 찍혀있는 교과서 들 뿐이었다. 학교도 현실은 마찬가지였다.

그 당시 엄청난 흥행을(?)을 누렸던 ‘어깨동무’라는 잡지 이외에는 내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책들은 많지 않았다. 이런 막막한 현실에서 나를 열광케 만드는 곳이 있었다. 바로 동네 할머니가 운영하는 만화방이었다. 독일군과 연합군의 전투장면, 북한 괴뢰군(?)의 탱크를 우리 국군이 수류탄 하나로 멋있게 폭파시키는 장면... 이 만화방은 나의 피난처, 나의 쉼터였다. 그 곳에 가기 위하여 나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가. 지네잡기, 고사리 꺾기, 아버지 담배 심부름.. 나는 돈을 손에 쥐고 만화방으로 뛰어가곤 하였다.

 지금 아이들이 내 말을 들으면 콧방귀를 뀔 것이다. 집안에 넘쳐나는 책들, 책읽어주는 부모님, 학교의 뜨거운 독서교육 열풍.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지금 우리 아이들은 엄청난 독서광이 되어 있어 마땅하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아이들 마음은 참 이상하다. 어른들이 책을 읽어라! 강요하면 절대로 안 읽는다. 그냥 보는 척 만 한다. 아이들은 그냥 재미있기 때문에 책을 읽는 것이지 재미있기 위해서 책을 읽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좋아하는 게임과 놀이에 몰입하는 아이들을 보면 이 세상을 모두 얻은 것같이 행복해 보인다. 당연히 재미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놀이하듯 게임하듯 스스로 책읽기의 재미를 찾아서 나간다. 단지 조금 더디게 갈 뿐이다.

 동네마다 내 어린 시절의 만화방 같은 작은 도서관이 있었으면 좋겠다. 책과 뒹굴며 놀 수 있는 공간 말이다. 마음대로 읽고 싶은 책을 읽으면서 몰래 주먹을 불끈 쥐기도 하고, 몰래 눈물을 훔쳐내기도 하는 그런 곳 말이다. 내가 고사리를 꺾고 지네를 잡으면서도 달려가고 싶었던 만화방 같은 도서관,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그곳에서 현실 너머의 희망을 꿈꾸었던 것 같다. 이 희망의 공간에서 나는 마음껏 상상하고 마음껏 꿈꿀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우리 도서관이 ‘희망의 작은 도서관’ 으로 선정되어 이 뜨거웠던 여름동안 새롭게 다듬어졌다. 8월 25일에 축하 잔치를 연다. 도서관을 운영하는 사람 스스로 자화자찬 하는 것 같아 약간 쑥스럽다. 그렇지만 아이들에게 희망을 전해주는 공간이기에 당당하게 희망을 원하는 모든 분들을 초대하고 싶다. 어른들은 어린 시절 만화방에 오는 기분으로, 아이들은 책 더미 속에서 뒹굴 수 있는 책 놀이터에 오는 기분으로 찾아 와 주었으면 좋겠다.

 장례식장에서는 장례식에 맞는 옷을 입고, 결혼식장에서는 결혼식에 맞는 옷을 입는 것처럼 우리 도서관은 2007년 새로운 희망의 공간을 위하여 새 옷을 갈아 입었다. 아직 그 옷의 색깔과 냄새와 형태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옷은 많은 사람들의 땀과 사랑과 희망으로 아주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엮어졌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도서관을 위해, 아이들을 위해 이 곳에 희망을 준 모든 분들께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이제 우리 도서관은 더욱 재미있고 소중한 공간으로 태어나야 한다. 어깨가 무겁다. 하지만 늘 내 어린 시절의 만화방을 떠올릴 것이다. 만화방 할머니는 고구마도 삶아 주었고, 따뜻한 보리차도 준비해 주었다. 희망의 도서관은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준비할까? 늘 넉넉한 할머니의 마음으로 아이들을 기다리겠다. <임기수/설문대어린이도서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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