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직격탄을 날린 태풍 '나리'는 서부 지역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17일 하늘은 태풍이 지나간 사실을 의심할 정도로 화창한 쪽빛으로 바뀌었지만 애월·한림 등 제주 서부지역에선 삶의 터전을 잃은 농민들의 한숨소리로 가득했다.

범람한 하천이 덮친 농경지와 주택가 등에는 각종 쓰레기와 토사로 넘쳐나고 마을을 잇는 도로는 유실된 곳이 없을 정도로 잔혹한 피해 흔적을 보여줬다. 

농경지 복구에 나선 주민들은 아침 일찍부터 구슬땀을 흘려 보지만 엄청난 피해 앞에선 역부족인 듯 허탈한 표정이 역력했다.

애월읍 어음리 소재 5000㎡ 규모의 천혜향 재배농장. 하루 전 하우스 시설이 있었다는 사실을 의심케 할 정도다.

16일 오후 태풍 '나리'가 몰고 온 강풍으로 14동에 이르는 하우스 시설이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게다가 하우스 시설에 묶어뒀던 천혜향 나무 수십 그루가 뿌리째 뽑히고 강풍에 쓰러진 나무도 적잖은 실정이다.

농장주 이모씨(55)는 "나무 한 그루라도 살려보고 싶다는 마음에 농장에 나왔다"며 이웃 주민의 도움을 받아 응급 복구에 나서보지만 속수무책이다. 

인근 알로에 농장도 태풍의 잔혹한 흔적은 마찬가지다. 이날까지도 도로를 타고 농경지로 흘러 들어오는 물로 진모 할머니(66)는 발만 동동 구르는 상황이다.

고성리 소재 1만㎡ 부지의 서부자동차공업사는 폐허를 방불케 할 정도로 참혹했다. 제주종합기계와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곳은 인근 하천이 범람하면서 밀려든 토사로 가득했다.

수천만원 상당의 기계를 뒤덮은 토사를 치워내기 위해 직원들이 자체 작업을 벌여보지만 단수 피해까지 겹쳐 곳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오고 있다.

한림읍 명월천 인근 주민들도 전날 범람한 물에 주택이 침수되면서 갈 곳을 잃는가 하면 각종 공사현장과 도로가 유실되는 등 피해 신고가 속출하고 있다.

관할 행정기관은 피해 복구 지원은커녕 피해 현황 파악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태다. /김경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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