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후유증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태풍 피해 등으로 몸과 마음이 지친 상황에서 정전·단수 등으로 생활 불편이 가중되고 피해복구 속도까지 더뎌지면서 '짜증지수'가 높아지고 있다.

복구 현장에서 크고 작은 사고가 잇따르고 있는가 하면 단수가 지속되면서 생수 등 일부 생필품을 구하려는 사람들로 일부 매장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별것도 아닌 일에 경찰관이나 공무원 등에게 욕설을 하고 멱살을 잡는 것은 물론 이웃간 갈등의 골도 깊어지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태풍으로 인한 상처가 낫기도 전에 사람들끼리 상처를 덧내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병원이 부상병동으로=태풍 '나리'로 피해를 입은 한마음병원은 18일 현재까지도 단수와 정전 등으로 기능이 마비된 상태다.

한마음병원 지하 1층부터 3층까지 침수되면서 양수기를 동원, 자체 배수작업을 벌였지만 인력과 장비 부족 등으로 복구 속도가 느린 상황이다.

방사선·검사 장비 등 고가 장비는 물론 전산장비와 보일러 시설, 자가발전기 등 기본적인 시설까지 가동되지 못하면서 16·17일 양일간 입원환자 200여명을 다른 병원으로 옮겼고, 현재 60여명의 환자만 병원에 남아있다.

하지만 단수와 정전 사태가 3일간 지속되면서 환자와 직원들의 불편이 가중되고 도시락이나 컵라면 등으로 끼니를 떼우는 등 후유증이 장기화되고 있다.

한마음병원 관계자는 "꾸준한 치료를 요하는 환자가 입원하고 있는 상황에서 단수와 정전사태가 장기화될 경우 병세가 악화될 우려가 있다"며 "가급적 빠른 복구를 위해 애를 쓰고 있지만 역부족이다"고 말했다.

태풍이 지나가면서 어린이와 노인을 중심으로 감기와 장염, 피부염 환자들이 속출하고 있지만 병·의원 복구가 늦어지면서 덩달아 불편을 겪는 사례도 적잖았다.

침수와 정전 피해를 입은 일반 병·의원들에서는 "피해복구 지원이 우선돼야 할 병원이 소외되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며 "제주도의 재난대응체계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대기 번호 80번' 늑장지원 불만=태풍피해 복구작업이 더디게 진행되면서 제때 지원을 받지 못한 주민들의 원성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다.

지난 16일 인근 하천이 범람하면서 토사로 뒤범벅된 고성리 소재 서부자동차공업사측은 행정의 늑장 대응에 불만을 토로했다.

수천만원이 넘는 기계 장비가 손 쓸 사이도 없이 토사에 뒤덮이는 등 한순간에 폐허가 됐지만 급수지원조차 이뤄지지 않아 자체 복구작업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5살짜리 첫째와 이제 갓 100일이 지난 둘째를 둔 두 아이 엄마 최모씨(32·제주시 용담동)는 동사무소에 배수 지원 요청을 했다가 황당한 답변을 들었다. "지금 대기하고 있는 사람이 많아 기다려야 한다"며 '대기번호 80번'을 받은 것.

"갓난아기를 데리고 집을 나설 수도 없는 상황"이라는 하소연에도 "더 급한 곳도 많다"는 대답밖에 돌아오지 않았다. 최씨는 결국 남편의 지인이 직접 포크레인을 끌고 물길을 터 준 뒤에야 친정으로 몸을 옮길 수 있었다.

70이 넘은 한 노부부는 태풍으로 집 담벼락이 무너지는 등 피해가 발생, 동사무소를 찾았지만 피해 접수 안내를 제대로 받지 못해 끝내 아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들 양모씨(42·제주시 연동)는 "피해접수가 많은 상황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연로하신 부모님이 피해접수를 위해 애를 태운 것을 생각하면 화가 난다"고 말했다.

제주시 이도2동에 거주하는 김모씨(53)는 "인근 주차장 공사로 지대가 높아지면서 물길이 마을을 향해 큰 피해를 입었다"며 "마을 전체가 물에 잠기는 엄청난 피해를 입은 곳에는 정착 급수 등 별다른 지원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울분을 토했다.

상황이 악화 일로를 거듭하면서 제주시청 홈페이지 등에는 이들 불만이 계속해 올라오는 등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단수 계속…생수 확보 비상=단수가 길게는 3일까지 지속되면서 제주시 일부 지역에서는 생수를 구하려는 사람들로 인근 매장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지방개발공사에 따르면 태풍 나리가 지나간 이후 서사라와 용담, 도남동 일대의 삼다수 주문량은 태풍 이전에 비해 갑절 가까이 늘었다.

강모씨(여·38·제주시 도남동)는 "17일 밤10시를 전후해 갑자기 물이 나오지 않아 급하게 생수를 사러 나갔는데 계산을 하느라 한참 줄을 섰다"며 "단수 여부에 대한 정보가 없었던 터라 더 당황했다"고 말했다.

회사원 이모씨(여·31·제주시 삼도1동)는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데려가야겠다'는 전화를 받고 당황했다. "단수 때문에 아이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먹일 수 없게 됐다"는 게 그 이유. 맞벌이 부부인 탓에 급하게 아이를 데리러 갈 사람이 없었던 이씨는 "뒤늦게 갔더니 아이가 배가 고파 거의 탈진 직전이었다"며 "속이 상해 아이랑 같이 울 수밖에 없었다"고 하소연했다.

이씨뿐만이 아니라 단수로 급식이 어려워진 어린이집 등이 휴원 결정을 내리면서 급하게 아이를 맡길 곳을 찾지 못한 맞벌이 부모들이 발을 동동 구르는 등 곤욕을 치렀다.

단수로 인해 침수피해를 입은 가재도구나 이불·옷가지 등을 제대로 치우지 못하는 것은 물론 변덕스런 날씨 탓에 흙먼지까지 날리면서 주민 불편이 가중되고 있다.

고 모씨(35·제주시 도남동)는 "피해 복구를 하다 다친 상처를 제대로 씻지 못하면서 병원 치료를 받아야할 만큼 악화됐다"며 "당장 먹을 물도 아쉬운 상황에 씻는 것은 호사나 마찬가지"라고 혀를 찼다.

△"네탓이오"…민원실 폭주=태풍 '나리' 피해로 민심이 흉흉한 가운데 경찰을 폭행하거나 순찰차량을 파손하는 등 공무집행을 방해하는 행위가 잇따랐다.

경찰에 따르면 18일 오전 0시20분께 모 지구대 내에서 A씨(48)가 "폭행신고를 접수받고 출동한 경찰이 되레 상대방을 옹호했다"며 강모 경사를 인체 일부로 들이받는가 하면 비슷한 시간대 연동 지역에서도 술에 취한 B씨(39)로부터 장모 경장이 폭행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앞서 17일 오후 10시10분께도 이혼녀를 폭행한 혐의로 붙잡힌 C씨가 순찰차량에 태우려는 경찰관에게 욕설하고 순찰차량 일부를 파손하는 등 공무집행을 방해하고 공용물을 파손하는 행위가 속출했다.

피해 복구 지원을 나갔던 공무원들이 지역 주민들에게 멱살이 잡히는 등 봉변을 당한 사례는 일일이 꼽을 수 없을 정도.

유례없는 하천범람으로 자동차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차량 분실은 물론 자동차 번호판 분실 신고가 제주경찰서와 파출소 등에 잇따르면서 일선 '민원실'도 폭주했다.

행정기관은 물론 한전 등에는 단수와 정전에 따른 민원과 불평이 쏠리면서 전화 불통 사태가 속출했고 '협박'성 전화까지 걸려오는 등 한바탕 소동을 치렀다.<고 미·김경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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