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오늘 먹고 잠잘 것도 막막한데, 추석은 무슨…"

제주시 용담2동 주민 양모씨 (여·57)는 추석 얘기를 꺼내기가 무섭게 손사래를 쳤다.

제11호 태풍 나리가 엄청난 비와 바람으로 제주를 덮친 지난 16일 양씨는 하천 범람으로 '집'을 잃었다.

급하게 마을회관으로 몸을 옮기기는 했지만 옷가지며 급하게 쓸 돈 한푼도 챙겨지 못했다. 통장과 도장 등이 든 서랍장은 진흙에 묻혀 형체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졌고, 손가방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젖어서 누가 누군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가 된 손자들의 사진이 제일 속상하다.

양씨는 "추석이라고 서울서 아들 내외가 내려온다고 했지만 오지 말라고 했다"고 했다. "와서 이 모습을 보면 속만 상하지 않겠냐"며 "아직 어린 손자까지 온다는데 잘 곳도 없고 마땅히 차례 지낼 곳도 없다"고 하소연했다.

양씨는 그러나 "나야 혼자니까 괜찮지 배고프다는 아이를 달래면서 가재도구를 챙기는 아기 엄마를 보면 이건 아무 것도 아니다"며 "죽었다는 사람도 한둘이 아닌데다 눈앞에서 차들이 수십 대 떠내려가는 걸 본 마당에 이 정도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이내 한창 정리 중이던 집으로 들어갔다.

추석을 앞두고 제주섬에 큰 생채기를 낸 가을 태풍 나리로 우울한 추석을 맞는 사람은 양씨만이 아니다.
복구 현장에서 만난 김성호씨(35·제주시 도남동)는 추석이 하루하루 다가오며 마음이 무겁다.

평소 같으면 가족들이 미리미리 벌초도 하고 했지만 올해는 아직이다. 비 날씨 등을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다 '태풍 벼락'을 맞는 바람에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김씨는 "고향집도 태풍에 피해를 봤다고 하는데 이곳 사정이 여의치 않아 안부전화만 하고 있다"며 "사실 산소가 제대로 있는지도 모르겠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고 말했다.

병문천 인근에서 만난 자영업자 이모씨(48·제주시 삼도1동)는 17일 하루 종일 집기와 상품들을 가게 밖으로 꺼내놓는데 소요한데 이어 18일은 그것들을 비닐로 덮고, 묶는데 소요했다.

이씨는 "여기에 12호 태풍이 올라오면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하다"며 "조금이라도 건져보겠다고 나서기는 했지만 피해 복구가 아니라 태풍 대비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 더 기가 막히다"고 푸념했다.

태풍 후 상승조짐을 보이고 있는 '추석 물가' 역시 우울함을 부채질하고 있다.

침수 피해 등으로 마을회관이나 경로당 등으로 거처를 옮기거나 친척이나 지인의 집에서 기거하는 이재민의 수만 600여명에 이른다.

당장 필요한 생필품 하나가 아쉬운 이들에게 추석 준비는 아직 먼 일. 거기에 태풍 이후 사과 등 제수품 가격이 상승세를 타고 있고 배추와 애호박 등의 가격도 기세가 등등하다.

집중호우에 이은 태풍 피해로 채소류 등의 가격은 앞으로 얼마나 더 오를지 두고봐야하는 실정이다.

제주 차례상 단골손님으로 선물용으로 인기가 많은 옥돔 역시 동문재래시장 등이 큰 태풍 피해를 입으면서 확보했던 물량 대부분을 잃을 데다 태풍 여파로 조업을 제대로 못하면서 추석 물량을 소화하기 힘들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7년차 주부 현경희씨(36·제주시 삼도1동)는 "추석 전에 큰 태풍이 지나고 나면 차례상 부담이 커지는데 올해는 유난할 것 같아 걱정"이라며 "추석빔 같은 것은 생각도 못하고 있고 선물도 가급적 줄일 계획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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