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하던 남북의 정상회담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가져 왔다. 가장 시급한 문제였던 이산가족들의 상봉도 그 어느 때보다도 상호 협조적인 분위기 속에서 준비되고 있다. 아세안 포럼에서 남북의 외교적 협력, 장관급 회담, 국제사회의 기대와 지원, 길어야 내년 초에는 이루어 질 것이라는 김정일의 서울 답방 등은 남북의 화해가 예전처럼 일회용이거나 정권 차원에서의 술수가 아니라 민족의 지상명령에 따른 것으로서 그 누구도 이 도도한 물결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희망을 안겨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김일성과 YS의 정상회담이 김일성의 자연사라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로 말미암아 좌절되었고, 그 후 조문파동으로 인해 남북관계가 더욱 경색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우리가 예측하지 못하는 어떤 장애가 남북화해의 길목에 자리잡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므로 그야말로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어야 할 것이다.

얼마 전 어느 대학에서 남북교류에서의 시민단체의 역할이라는 주제의 세미나가 열렸다. 사랑의 감귤 북한 보내기 운동에 참여하여 평양을 방문했었다는 이유로 필자도 그 경험담을 발표하게 되었다. 평양의 촛불을 켜는 호텔 스카이 라운지, 텅빈 고속도로 등 심각한 전력 사정과 마비된 유통 체제를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보낸 감귤 5천톤을 분배하려면 5톤 트럭 천 대가 필요한데 북한은 감귤에 쏟아부을 그런 능력이 없으므로 가까운 지역이나 분배가 되고 썩힌 양도 상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김일성 주석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 궁전의 참배 광경을 이야기하면서 북녘의 김 부자에 대한 우상화는 광신도의 모습 그대로였다고 말했다. 그런데 토론에 참여한 한 교수가 필자의 발표에 대해 쓴 충고를 해 주었다. "평양에 다녀온 사람들이 제발 말조심 좀 해 주었으면 좋겠다. 남쪽이라고 부정적인 면이 없는 것이 아니고, 또 북이라고 나쁜 점만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남북 화해를 위해서는 도자기를 빚는 예술가의 혼이 필요하다." 필자는 말조심이라는 용어에 마음이 상하여, 북쪽을 의식하여 하지 못한 숨은 이야기가 많다고 반박을 하면서 김 부자에 대한 우상화 현상은 상상 이상이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세미나가 끝난 후에 그 지적이 필자에게 정말 필요한 충고였으며, 그것은 필자 뿐 아니라 남북관계에 참여할 많은 사람들이 두고두고 새겨야 할 내용임을 깨닫게 되었다.

필자는 북쪽의 열악한 식량과 에너지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그러니까 우리가 피를 나눈 동포로서 더욱 적극적으로 지원에 나서야 하며, 우상화의 모습을 전하면서, 우리와는 다른 가치관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이므로 서로의 이질감을 해소하고 이해, 협력하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인적 교류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했다. 지금 당장 통일이 된다면 감당할 능력이 없는 남과 북 모두 큰 일이라고 준비 없는 통일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지금부터라도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고 말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은 필자의 마음속에만 있었지 청중들에게는 단순히 북쪽의 어려움과 모순을 지적하는 것으로만, 그리고 현상황에서의 통일 불가론으로만 전달된 것이었다. 심지어 필자의 주변에는 방북소감을 듣고 "감귤을 보내도 나눠먹을 능력이 없으니 보낼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말을 업으로 하는 필자의 경우도 이러한데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하랴 싶다. 함께 부대끼며 살아 온 우리끼리의 대화(앞서 말한 그 교수는 필자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하다)도 이렇게 진심을 전하기도 어려운데 남과 북이 만나서 하는 대화는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 북쪽에서 이회창과 YS를 놈 자 붙어가면서 비난했다고 일부에서는 야단이다. 청와대가 강력히 항의하지 않는다고 남에서도 서로 비난이다. 그러나 북쪽을 탓하기에 앞서 인도적인 지원마저도 상호주의에 입각해서 제동을 걸고, 친북주의자 운운하며 빛바랜 색깔론을 제기하며, 북의 최고 지도자를 독재자라 욕하는 자신들의 모습도 반성해야 한다. 정상회담 기간 중에 인공기 게양 학생들을 보안법 위반으로 처벌하겠다는 공안검사의 발언 때문에 정상회담이 위기에 처했었다는 비화를 소개함으로써 우리 대통령이 수모를 당한 것처럼 보이게 하여 화기애애했던 정상회담의 분위기를 망쳐버리는 관료의 어리석음도 반성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귀한 것일수록 상처가 나기 쉬운 법이다. 세계사적인 의미를 갖는 남북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도자기를 빚는 장인의 섬세함과 진지함을 익혀야 하겠다.<임문철·천주교 서문교회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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