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맞은 태풍은 인간들에게 경고장을 던진 것…더불어 살려면 개발을 외칠 게 아니라 환경·복지를 말해야"

내 어릴 적 비오는 날은 참 좋았다. 마당이 흙바닥이었던 우리 집은 비가 조금 많이 내리면 어린 내 무릎까지 물이 차올랐다. 아버지는 비옷을 입고 물고랑을 파 물이 잘 빠져 나가도록 했고 어린 우리 남매들은 그 물이 다 빠져버리기 전에 물장난을 치고 첨벙거리며 뛰어 놀기 바빴다. 비를 맞으며 뛰어노는 아이들과 물코를 트려는 어른들의 모습은 자연스런 조화를 이루며 내 어릴 적 추억의 한 장면으로 남아있다. 집 바깥에서의 노동을 멈추고 집안에 식구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자면 어머니는 텃밭에서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깻잎과 부추 호박 고추를 따다 썰어 넣어 부침개를 부치셨다. 여름 내내 짬을 내어 캐어둔 조갯살을 푸짐하게 넣어 먹었던 그 부침개 맛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걸 보면 여간 맛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내 어릴 적 비오는 날은 삶에 있어서 가장 여유로운 순간을 느끼게 해주는 날이었다.

4년 전 추석연휴 마지막 날, 둘째아이가 태어나기 일주일도 안 남았던 때였다. 만삭이었던 나는 베란다로 스며드는 빗물을 퍼내며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끊임없이 스며들었던 빗물은 서너 시간이 지나서야 차츰 잦아들었다.

올해 우리가 맞이한 태풍은 인간들에게 경고장을 던져주는 것 같다. 화산섬 제주가 언제부터 수해재난지역으로 바뀌었을까. 이제 우리들은 정말 알아채야 할 것이다. 산과 바다와 대지와 들판이 분노하고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하루가 멀다하며 새로 뚫어놓는 도로와 거대한 골프장들, 작은 물길들도 막아버리고 덮어버리는 무지한 인간들의 행위가 이제는 부메랑이 되어, 돌연변이 태풍이 되어 우리들에게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10여년 전 한 친구의 죽음이 떠오른다. 다리 아래 하천 옆에 살았던 그 친구는 집안이 어려워 우유배달을 하며 학교에 다녔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 그는 자신이 몰던 우유 배달차가 무사한지 확인하러 나갔다가 불어난 냇물에 휩쓸려 떠내려가 시신도 찾지 못했다. 이번 태풍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넋이 나간 얼굴들이 떠오른다. 환경재앙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먼저 닥친다.

근시안적인 이윤추구를 위해 눈에 불을 켠 개발업자들의 달콤한 사탕발림에 더 이상 놀아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정녕 사람들이 더불어 잘 살아가려면 경제와 개발을 외칠 것이 아니라 환경과 복지와 평화를 말해야 한다.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파헤쳐지고 잘려나간 자연의 상처들을 보듬어줘야 한다. 나무와 숲을 가꾸고 물이 잘 흐르도록 실개천들을 보호하고, 보기 싫다고 막아버렸던 우리 주변의 하천들도 살려내야 한다. 풍성하고 여유로운 한가위의 계절이 태풍과 폭우로 공포스런 나날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다. <오금숙·주부>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