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강 군사요새화…상생·평화의 나래는 아직

   
 
  ▲ 사진은 상공에서 내려다본 대정 알뜨르 일대  
 
60년 전 4.3희생자들을 다시 만난다면, 그 분들은 제주후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질까? 지구 반대편 스페인의 끝자락에 영국 식민지로 살아가는 지브롤터 사람들은 300년 전 그들의 조상들에게 과연 무슨 말을 할까? 환갑을 맞는 4.3이 여전히 제주에서 현재진행형인 것은 화해와 상생, 평화로 나아가는 길이 험난하기 때문이다.

# ‘수난의 역사 굴레’에서 살아온 제주

일본과 미국, 거슬러 올라가 몽골까지 제주를 군사적 거점기지로 삼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일본이 제주에 대한 야욕은 1937년 중일전쟁 당시 중국 본토 공격을 위해 1935년부터 도민들을 강제노역시켜 만든 20만평 규모의 알뜨르비행장 등 군사기지를 통해 현실로 드러난다. 1945년 2월 패전을 앞둔 일제가 제주에 제58군사령부라는 독자부대까지 신설해 7만명을 주둔시켜 제주섬을 최후저지선으로 삼았던 결7호작전. 1945년 9월 제주상륙을 계획했던 연합군이 한달만 계획을 앞당겼더라도 제주의 운명은 ‘미군과의 전투로 불바다가 됐던 히로시마와 같은 처지’였을 것이란 끔찍한 상상을 가능케 한다.

어승생악의 토치카, 성산일출봉의 진지동굴, 한경면 가마오름의 진지동굴, 섯알오름의 고사포진지, 그리고 서귀포 정방폭포 인근의 해안절벽과 일출봉, 송악산 해안절벽 등 섬 곳곳에 어뢰정을 숨겨놓기 위해 파놓은 진지동굴 등 수도 없는 군사시설은 제주섬 전체를 요새로 만들려는 일제의 철저한 계획을 보여준다.

#“제주도는 장차 지브롤터”

4.3이 일어나기 전인 1946년 10월22일 한성일보와 조선일보엔 ‘제주도는 중요지대/장래 지브롤터화 할 가능성’이란 기사가 실린다.

당시 AP통신의 시사평론가였던 화이트씨는 “조선 제주도는 장차 서부태평양지구에 있어서의 ‘지브롤터화’할 가능성이 있다. 제주도가 금일과 같은 장거리 폭격기시기에 있어 그 군사적 중요성을 띄우고 있음은 이 기지로부터 동양 각 요지에 이르는 거리를 일별하면 능히 해득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일본 사세보까지 150마일, 동경까지 750마일, 대만까지 700마일, 대련까지 470마일, 상해까지 325마일, 해삼위(블라디보스톡)까지 720마일, 마닐라까지 1400마일, 하바로프스크까지 1000마일, 보르네오까지는 2000마일이다. 일본이 중·일전쟁에서 최초 도양(渡洋, 바다를 건너)폭격을 한 것도 제주도로부터 결행된 것”이라고 보도했다

해방 후 새롭게 등장한 미군정 또한 제주섬을 전략기지로 삼으려는 일제와 다르지 않다는 의미다.

2차 대전 후 패전국 일본을 관리하고 옛 소련과 중공(중국)을 겨냥한 미군기지들이 속속 일본과 한반도에 들어서고 4.3학살의 배후에 미군정이 있었음은 결코 무관치 않다.

4·3발발 직전인 1948년 3월28일 이승만은 방한중인 미육군성 차관 드래퍼(Draper)와의 회담에서 “미국이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설치하고자 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말을 들었다. 한국정부가 수립되면 한국인들은 기꺼이 미국이 제주도에 영구적인 기지를 설치하도록 할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1953년 한국과 미국 사이에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미국은 자국의 육·해·공군을 무상으로 한국군 기지에 영구배치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됐다.

# “맥내브기지를 기억하라”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으로 해석되는 한국전쟁이 진행되던 1953년 대정읍에 제1훈련소가 들어선다. 미국은 이 보다 앞선 1952년 1월부터 1년3개월간 공사기간을 거쳐 모슬봉 정상에 레이다기지를 설치했다. 당시 미군 수석 고문관인 맥내브 대령의 이름을 따 붙여진 맥내브기지는 규모만 3만9971㎡(1만2000여평)에 이른다.

맥내브기지는 한국전쟁에 파병된 미군들을 위한 각종 편의시설들과 미2사단 장병들의 훈련장으로 사용됐으며 모슬봉 정상 레이다기지는 주변국들의 통신을 도청하기 위해 활용된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주둔하던 미군은 대정읍과 안덕면 주민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지난 2002년 효순·미선 여중생사망사건 등은 당시 주한미군 범죄의 심각성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현재는 공군 제8546부대가 사용하고 있지만 지난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인근 산방산과 사계리 해안 일대에선 한미해병들의 합동상륙훈련이 이어져왔고 지금도 산방산 절벽엔 훈련에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하얀색 페인트 숫자들이 뚜렷하다.

# 700여년 전부터 제주섬은 군사요새화

1267~1269년 몽골 황제 쿠발라이는 제주섬을 남송과 일본 정벌의 전초기지로 삼기위해 사신을 보내 당시 탐라주변의 바닷길을 조사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1273~1294년엔 잘 알려진 것처럼 몽골이 삼별초의 항파두리성을 함락한 후 21년동안 남송과 일본 정벌의 병참기지로 활용했었다. 1280년엔 몽골이 일본 정벌을 위해 제주섬에 ‘전함 수리소’를 설치하는 등 제주섬을 동북아의 군사요충지로 만들려는 시도는 무려 740여년 전부터 계속되고 있다.

최근 미국이 북핵을 빌미로 한쪽에선 평화의 제스처와 다른 한편으론 대중국, 대러시아를 겨냥한 동북아 지역의 전투력을 강화시키는 GPR(해외 주둔군재배치) 추진이 제주에 건설하려는 해군기지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주장은 이같은 오랜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미군이 괌에서 시작해 오키나와-사세보-부산·대구-평택-평양으로 마무리되는 제2의 한국전쟁 가상시나리오에 기초한 미국의 동북아GPR 전략을 유심시 살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해군기지로 잠시 잊고 있는 공군의 제주탐색·구조부대설치 계획까지 현실화된다면 한반도평화를 위해 싸웠던 60년전 4.3 희생자들의 화해와 상생은 어떻게 해야할까? 전쟁을 막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해 무력으로 평정하는 팍스(pax)적 평화론과 폭력·전쟁의 구조를 없애는 적극적 평화론의 갈등에서 제주인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