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식 (제주대 연구교수, 한국근현대사)

△가치관에 따라 명칭도 달라

1948년 4월 3일 당일 일어난 사건은 폭동, 무장봉기 등으로 신문에 보도되었다. 신문 매체가 갖는 공공성으로 인해 독자 대중들에게 4·3은 뚜렷이 공적 인식으로 각인되었다. 이후 대중들은 이 사건 전반을 ‘4·3’이 들어간 명칭으로 부르게 되었다. 다만 ‘4·3’의 뒤에 붙는 명칭은 공적 인식의 변화를 사회가 수용하는 정도와 개인·공동체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불렸다.

1948년 4월 3일 재산 무장대의 습격에 대한 미군정 당국의 공식적 반응은 “폭도들의 총선거 반대 폭동”으로서 즉각 소탕한다는 것이었다. 4월 중순 이후 무장대와 미군정이 심하게 대립하는 과정에서 언론매체의 인식도 상반되게 나타났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우익계 신문들이 ‘폭동’의 인식 기조를 유지한 반면, 「독립신보」, 「우리신문」, 「조선중앙일보」 등 중도좌익계 신문들은 ‘소요사건’, ‘무장봉기’, ‘제주도의 항쟁’, ‘제주도 인민봉기’ 등으로 보도하였다. 특히 「독립신보」는 “제주도민들이 외군 철퇴, 단선단정 반대 등을 부르짖은 끝에 민·경 간의 무력충돌로 발전한 제주도 소요사건”이라고 정리하였다.

△질곡의 4·3 역사

1948년 6~7월에 긴박했던 제주도 상황이 느슨해지자, 신문과 잡지 지면에는 4·3을 중립적인 입장에서 보려는 기사들이 늘어났다. 당시 제주 현지를 다녀간 기자들은 미군정 당국, 경찰의 입장과는 매우 다르게 4·3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제 언론을 통해 ‘4·3사건’이란 용어가 일반적인 사건명으로 인식되어 갔다. 또한 이 시기 4·3 관련 재판을 치렀던 법조인들은 4·3을 ‘불행한 사건’으로 인식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4·3은 ‘해결해야 할 사건’이 아니라, ‘진압해야 할 반란’으로 인식되었다. 1948년 11월부터 1949년 2월까지 제주도 일원을 초토화시킨 대한민국 군대와 관련된 신문 기사는 반도 및 폭도와의 전투에서 승전했다는 공적사항으로만 채워졌다. 수많은 주민들의 죽음은 대한민국의 공적인 인식 대상에서 감추어졌다.

전쟁과 이승만 집권을 거치는 과정에서 ‘폭동·반란’으로 억압되었던 4·3 인식은 1960년 4·19 혁명을 거치며 다시 ‘사건’으로 환원되었다. 일부 ‘항쟁’의 인식을 공적으로 제기하는 노력도 있었지만, 1961년의 5·16 쿠데타로 좌절되었다. 이후 반세기 동안 4·3은 국가 권력의 공적 인식만이 통용되는 시간이었고, 4·3의 논의 자체가 금기시되었다. 역사적 인식과 기억을 국가가 주도하여 통제하는 기재로서 활용되는 국사 교과서에는 4·3은 “북한 공산당의 사주 아래 제주도에서 일어난 공산무장폭동”으로 서술되었다.

△4·3 실상·성격 명확히 밝혀야

4·3에 대한 재인식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비롯되었다. ‘항쟁’ 인식이 학생층과 시민사회에서 제기되었고, 활발한 진상규명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4·3을 아직도 ‘폭동’으로 보는 정부의 인식과 여러 지점에서 대립하였다. 국사 교과서 및 역사교육자료에서는 1990년대 중반까지도 4·3은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의 5·10 총선거를 교란시키기 위하여 일으킨 무장폭동”이었다. 1994년 현대사 전문학자를 중심으로 4·3을 ‘항쟁’으로 교과서에 서술해야 한다는 교과서 개편시안을 제시했지만, 보수 언론과 정치권의 압력 속에 백지화되었다.

4·3의 공적 인식이 제 자리를 잡게 된 것은 2000년 4·3특별법의 제정과 2003년 4·3진상조사보고서의 확정, 대통령의 공식 사과 등 일련의 제도적 해결 과정의 결과였다. 그러나 진상조사보고서 확정 과정에서 재연된 끊임없는 이념 논쟁, 2000년 「제주경찰사」 왜곡 사태, 2004년 국방부 「6·25 전쟁사」의 왜곡 등 4·3의 공적 인식을 둘러싼 싸움은 지속되고 있다.

4·3의 공적 인식은 당시 상황으로부터 4·19, 6월 항쟁, 특별법 제정과 진상보고서 확정을 거치며 변천하여 왔지만, 아직도 ‘사건’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공적 인식·서술의 변천 과정을 검토해 본 결과, ‘사건’의 명칭을 확보하는 것 또한 매우 어려운 과정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앞으로 진전된 공적 인식의 획득은 ‘사건’에 머물러 있는 4·3의 실상과 성격을 더욱 명확히 밝히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박찬식 (제주대 연구교수, 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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