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상규명 발자취 "4·3 60주기 결집된 힘으로 다시 시작 "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다". 어느 역사학자의 말처럼 역사는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소통하는 대화의 창구다. 현재를 사는 우리에 의해 역사는 쓰여지기 마련이며 오늘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자 내일을 내다보는 창이 되기도 한다.
 2008년 현재의 제주가 60주기를 맞은 4·3을 잊지 말아야 하고 끊임없이 되짚어야 하는 이유이다.
 4·3이 60주기를 맞았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까지 60년이라는 지난한 투쟁이 이어졌고 60주기를 맞은 현재 역시 4·3은 미완으로 남아있다.
 
 # 4월 혁명, 4·3 첫 공론화

 

   
 
   
 
 1948년 4월3일, 그날 이래 제주는 ‘불온한 반역의 섬’으로 낙인찍혔다. 이념의 잣대로 제주는 원인을 불문한 폭도의 땅이었으며, 제주도민의 죽음은 국가에 의해 '폭동'으로 규정지어 합리화됐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도 제주는 입조차 벙긋할 수 없는 설움의 땅이자 고립된 섬이었다.

 한 맺힌 침묵이 깨진 것은 그로부터 10년여가 지난 후다.
 4·3은 1960년 4월 혁명 직후 처음으로 공론화됐다. 4·19로 반공독재체제가 무너지자 제주도민들은 억울함을 분출하기 시작했다.

국회가 그해 5월 한국전쟁기간 거창 함양 양민학살 진상조사 특위를 구성하자 제주에서도 제주대 학생을 중심으로 7인의‘제주4·3사건진상규명동지회’가 결성,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당시 제주신보가 피해사실 신고접수 창구를 마련했으며, 의례적인 조사에 그친 국회에 항의하는 국회 앞 시위도 벌어지는 등 도민들의 4·3 진상규명 의지는 높았다.
 

 # 군부독재 속 오랜 침묵

그러나 이 모든 것은 5·16쿠데타로 단번에 중단됐다. 군부독재 속 4·3은 입 밖으로 내서는 안되는 ‘금기’였으며, 대탄압 속에 4·3의 진실은 20여년간 폭동의 역사로 규정됐다.

4·3의 ‘금기’를 깬 것은 문학의 힘이었다.

1979년 제주출신 작가 현기영씨가 중편소설 ‘순이삼촌’을 통해 30년전 비극을 소설 속에 녹여내면서 꽁꽁 묻혔던 4·3은 수면위로 떠올랐다. 순이삼촌으로 물꼬를 튼 4·3진상규명 논의는 이후 1987년 시민항쟁 이후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속도를 붙여갔다.

1989년 재야운동단체를 중심으로 한 ‘사월제공동준비위원회’가 결성, 제1회 4·3항쟁추모제가 시민회관에서 열렸으며 같은 해 5월에는 제주4·3연구소가 발족됐다.

1989년 4월3일을 기점으로 제주신문이 4·3의 증언을 연재하기 시작했으며 제주신문 사태로 중단됐던 4·3 연재는 1990년 제민일보 탄생과 함께 ‘4·3은 말한다’로 본격 연재되면서 4·3을 도민사회 이슈로 공론화했다. 4·3특별취재반이 현장을 다니며 채록한 4·3연재는 4·3을 금기영역으로만 인식했던 도민들의 묵은 한을 공개적으로 표출하고 재정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군부정권 퇴진, 진상규명 가속도

 1993년 문민정부 출범에 따른 군부정권 퇴진으로 4·3 진상규명 운동은 가속도를 붙였다. 같은 해 제주도의회는 4·3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마을별 조사를 실시, 4·3 피해조사 보고서(1995년)를 발간했다. 

 1998년 4·3 50주기를 전후로 4·3 진상규명을 위한 도민의 열망은 더욱 불을 불여갔다.

 이에 앞서 서울에서 ‘제주4·3 50주년기념사업추진범국민위원회’(공동대표 강만길 김중배 김찬국 정윤형)가 결성, 4·3진상규명을 위한 전국적인 연대가 이뤄졌다.

 김대중 정부 출범과 함께 국회내 4·3 진상조사 특위가 설치됐으며 4·3특별법 제정도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4·3 진상규명에 동참했던 도내 시민사회단체, 문화예술, 학생단체가 함께 한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 같은 해 ‘4·3 특별법 쟁취를 위한 연대회의’가 결성되는 등 4·3 특별법 제정을 위한 도민들의 통일된 목소리가 정부를 상대로 끊이지 않았다.

 # 4·3특별법 제정

 마침내 1999년 12월16일 제주4·3특별법이 본회의를 통과했으며, 2000년 1월12일 제주4·3사건진상규명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공포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1948년 4·3발발 이후 50여년, 1960년 진상규명 운동의 첫 발걸음을 뗀 이래 무려 40년만의 일인 셈이다. 제주 역사의 진실을 찾기 위한 지난한 투쟁, 실로 대장정이 아닐 수 없었다.

 2003년  제주4·3사건진상보고서가 최종 확정됐으며 같은 해 10월31일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를 찾아 정부수반으로서는 최초로 ‘국가 공권력에 의한 비극’을 머리 숙여 공식 사과하는 감격적인 순간도 이어졌다.

 노 대통령은 2006년 제58주년 제주4·3사건희생자 위령제에 직접 참석했으며 2007년 위령제에서는 국무총리가 대신 참석해 4·3을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 후대에 되새길 것을 다짐했다.

 2006년 12월에는 제주도민들이 계속 요구해왔던 4·3특별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 희생자 유족범위 확대, 유해발굴 수습 및 평화재단 설립 근거 마련 등의 성과를 얻기도 했다. 

 #  남은 과제 해결 '도민의 힘'으로

 

   
 
   
 
4·3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특별법 개정 과정에서 요구됐던 국가차원의 유족 배상문제를 비롯해 국가추모일 지정, 희생자 의료비·유족 생계비 지원 등은 반영되지 못했다.

 이와 함께 유해발굴 사업의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지원 및 정부차원의 추가진상조사 등 국가의 손이 닿아야 할 문제는 수두룩이다.

 평화재단 및 4·3사료관 및 평화공원의 안정적 운영을 위한 정부의 예산 지원 등은 현안과제다.

 무엇보다 정부의 책임감 있는 지원을 이끌어낼 도민들의 결집된 목소리가 그 어느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4·3에 대한 공약이 전무, 4·3완전해결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4·3의 미진한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기념사업 등 4·3완전해결을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도민의 힘으로 이끌어내야 한다.                                                                                                            박미라 기자 mrpark@jemin.com

 

 

- 1960년 : 4·19 혁명 분위기 속 진상규명 운동 시발. 5·16쿠데타로 탄압이 가해지면서 4·3논의 장기간 금지
- 1978년 : 현기영 소설 '순이삼촌'으로 4·3논의 물꼬
- 1988년 : 6월 항쟁 열기,  4·3 40주년 맞아 진상규명 운동 본격화. 연구서적 및 문학작품 봇물
- 1989년 : 제주신문 '4·3의 증언' 연재,  4·3연구소 설립. 제주신문 사태 발생  4·3증언 연재 중단
- 1990년 : 제민일보 창간 더불어  '4·3말한다'연재 시작
- 1993년 : 문민정부 속 도의회  4·3특위 결성, 국회차원 논의 본격화
- 1995년 : 도의회  4·3특위 '4·3피해조사 1차 보고서' 발간
- 1997년 : 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 공약으로 내건 김대중 대통령 당선
- 1998년 : 제주 4·3사건희생자위령사업범도민추진위 주최 제50주년 4·3사건희생자범도민위령제 등 4·3 50주기 기념행사 및 진상규명, 명예회복 요구 봇물.  새정치국민회의 제주도 4·3사건진상규명특별위원회 구성 운영
- 1999년 :  4·3특별법 쟁취를 위한 연대회의 결성(24개 시민사회단체) 특별법 제정운동 본격화, 제주 4·3특별법 본회의 통과
- 2000년 : 제주 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특별법 공포
- 2001년 :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 작성기획단(단장 박원순) 공식 발족
- 2003년: 제55주년 제주 4·3사건희생자범도민위령제 고건 국무총리 참석, 제주4·3사건진상보고서 최종확정, 노무현대통령 정부수반으로서 정부차원 최초 국가공권력에 의한 도민희생  공식사과 표명
- 2006년 : 제58주년 제주4·3사건희생자위령제 노무현대통령 참배 및 공식사과,  4·3유해발굴 본격 시작
- 2007년 : 제주4·3사건특별법 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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