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애니메이션 완성 앞둔 박재동 화백

4·3을 알리기 위해 당대 최고였던 '한겨레그림판'을 갑작스레 접고 애니메이션작업에 뛰어든 박재동 화백(55). 십수년동안 4·3애니메이션 작업에 몰두해 온 그가 올해 개관하는 4·3평화공원 사료관에 3분과 15분짜리 짧은 애니메이션으로 드디어 우리 곁에 찾아온다. ㈜오돌또기를 설립해 집중조명을 받아놓고 아직 열매를 맺지 못했다며 내내 '제주도민들을 만난다는 게 부담스럽다'는 그는 오늘도 작업실에서 한 장면, 한장면을 완성시키기 위한 싸움을 벌인다.

1996년 4·3장편 애니메이션 오돌또기 설명회 이후 그의 근황을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다는 말에 박재동 화백은 "처음엔 2년을 생각했는데 이제 10년이 더 돼 버렸고 이제 나의 평생 과제가 돼 버렸다"며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찌든 세상을 날마다 한 컷 만화로 독자들을 한바탕 웃게 만드는 그의 재주에 혹자는 '한 컷의 정치사회학 대가'라고 평하기도 했고 '박재동=만평=한겨레'라는 등식을 만들만큼 그의 만평보는 날마다 새로웠다.

 그런 그가 갑자기 1997년 만평을 그만 그린다는 소식에 독자들의 놀라움은 당연한 것이었다.

 "갑자기는 아니고 삼고초려 끝에 내려진 결정이죠. 한겨레를 그만두기 3년전부터 4·3애니메이션을 하려고 마음먹고 있어서 제주도현지답사를 계속하면서 자료수집을 했지요. 신문사 편집국장한테 '4·3 애니메이션 만든다고 그만두겠다'고 하니까 '절대 안 된다'고 해서 다음해, 또 다음해까지 삼고초려 끝에 허락을 받았지요"라고 설명했다.

 박 화백의 결심엔 대학시절 만난 30년도 더 묵은 오랜 벗 강요배 화백이 한 몫했다.

 "대학에 처음 입학해보니 나처럼 경상도, 요배는 제주도에서 이렇게 팔도사나이들이 다 모였는데 요배한테서 얼핏 4·3에 대해 얘기를 들었지. 강요배는 워낙 감수성이 예민하고 독특하고, 아름다움을 아는 친구여서 같이 지내게 됐고 2학년 되던 1973년에 함께 자취하면서 제주4·3에 대해 듣게 됐는데, 그 일들을 잊을 수가 없었어. '야! 이럴 수 있나'하는 생각들이 말야"

 박 화백은 대학졸업 후 6년동안 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일하다 1987년 한겨레신문의 시사만화가로 등장하게 된다. 그즈음 강요배 화백은 고향 제주에 정착해 제주의 풍경, 제주민중의 역사를 그리기 시작할 때라고 박화백은 설명했다.

 박 화백은 "강요배가 그린 제주민중항쟁사, 그중에서도 '붉은 바다'를 봤는데 뭔가 가슴에서 꿈틀거리는데, '이걸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고희범 선배(제주출신, 전 한겨레신문 사장)하고 상의를 했더니 극장용 장편을 만드는 쪽으로 생각을 굳히게 됐다"며 "물론 그 전에 현기영 선생의 '순이삼촌' 등을 통해서 공감을 깊이 하게 됐다"고 말한다.

 그래서 박 화백과 강 화백은 장르가 다른 '예술적 동지'이자 '비판가'로 서로를 존중한다. 박 화백은 "강요배는 제주에서 회화에 몰두하며 우리나라에서 얼마 안되는 전업작가로 귀하게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며 "신문에 실린 내 작품이나 요배 화실에서 작품을 보고 서로 지지해준다. 해가 갈수록 요배작품이 아름답게 변해가고 있고 정말 꾸준히 성실하게 작업을 하는 모습은 항상 자극이 된다"고 친구자랑을 늘어놓는다.

 이렇게 그는 잘 나가던 한겨레 그림판을 접고 애니메이션 제작사에 있던 친구·후배들과 함께 오돌또기를 설립하고 4·3애니메이션 소재발굴에 정성을 기울였다. 하지만 시나리오와 재정부족으로 당초 야심차게 계획했던 극장용 4·3장편 애니메이션은 아직 우리 곁을 찾아오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왜 그토록 4.3애니메이션에 집중하는지 묻자 박 화백은 "4·3이 민족사적으로 너무 중요한, 나에겐 한번은 해결해야 할 고비, 시련인 것 같다. 민족사적으로도 해방이후에 벌어졌던 제주만이 아니라 비슷한 학살이 많이 벌어졌는데 4·3이 가장 집약적이고 참혹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이것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아주 간단히 설명하면 그냥 4·3영령들의 소리가 쟁쟁해서 그만 둘 수가 없다"고 말한다.

 더불어 박 화백은 "나한테는 이것이 삶이 돼버렸는데, 이게 좋아요. 물론 12년을 하고 있지만 힘든 일이고, 그래도 중대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하기만 하다"며 "제주에서도 60주년 되는 해이지만 개인적으로도 넘어야 할, 넘어가지 않으면 안될 산이어서, 우리 민족사도 그렇고…"라고 말을 맺는다.

 4월에 공개되는 단편 애니메이션에 대해 묻자 "3분짜리는 1월말까지 마무리될 것 같고 15분용은 어린이용인데 왜 이런 슬픈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쉽게 설명할 수 있게 구성했다"며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현기영 선생의 '마지막 테우리' 속에 있는 작은 에피소드를 가지고 제작했다"고 설명했다. 

예술을 통한 '증언의 힘'의 시대를 열어가는 최근의 몇몇 만화가들에게 박재동 화백은 "요즘 박건웅 만화가의 '노근리 이야기' 등은 예술이 하는 많은 역할 중에 역사의 증언 역할을 하는 것 같다"며 "돈벌이가 되는 것도 아닌 참 어려운 작업인데 참 고맙고 귀한 후배다. 역사적 사명 없이는 못한다. 모든 예술가가 다 그럴 필요는 없지만 예술영역이 즐거움과 아름다움, 슬픔이 다양해지길 바란다"는 말을 던진다.

오돌또기 생활 12년. 박 화백은 2008년 한해동안 학교(한국종합예술학교)에서 안식년으로 쉬게 됐다며, 그동안 진전이 없던 4.3오돌또기에 집중할 계획이라고 말해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을지 또한번 기대하게 만든다. 서울=변경혜 기자 che610@jemin.com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